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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일자 오피니언면 '조선데스크'란에 이 신문 이선민 문화부 차장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30일 아침 한 중견 정치학 교수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교과서포럼’의 창립 멤버로 기존 고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앞장서 왔다. 그는 한 라디오 방송 시사 프로그램으로부터 “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에 관한 인터뷰에 응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했다. ‘4·19는 혁명 아닌 학생운동’ ‘5·16은 쿠데타가 아니라 혁명’ ‘유신체제가 국가동원력을 크게 높였다’는 부분을 질문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교수는 즉석에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대안교과서 관계자들이 의견을 조율하지 않은 상태에서 집필진의 개인 의견을 담은 ‘시안’이 교과서포럼의 공식 입장인 양 보도된 데 당혹감을 표시했다. 그는 “이틀 전 이메일로 배포된 시안을 보고 집필진 중 상당수가 일부 내용에 이의를 제기했는데도 그대로 언론에 배포됐다”며 “이런 혼선이 한국근현대사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교육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에 부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런 우려는 이날 오후 서울대에서 열린 대안교과서 토론회에서 곧바로 현실로 나타났다. 4·19혁명 관련 단체 회원 수십 명이 발표·토론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토론회 자체가 무산된 것이다. 비판은 정치적 입장을 같이해 온 뉴라이트 진영 내부에서도 나왔다. 자유주의연대를 비롯한 5개 뉴라이트 단체는 “시안이 기존교과서의 좌(左) 편향을 바로잡으려다 역 편향의 오류를 범했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교과서포럼을 주도하거나 대안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학자들은 학문적·정치적으로 다양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이끄는 경제사학자들과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는 정치·사회학자들은 민족·민주·통일을 강조하는 좌파민족주의를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구체적인 시각은 상당히 다르다. 따라서 대안교과서 집필 과정에서 그런 차이가 드러날 수도 있다. 또 대안교과서가 꼭 하나일 이유도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20세기의 집단기억을 둘러싸고 ‘사관(史觀)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민족·계급·근대화·통일 등 굵직굵직한 주제들을 놓고 좌와 우, 민족주의와 세계주의, 친북과 반북이 날카롭게 부딪치고 있다. 오랫동안 학계와 교육현장을 장악해 온 좌파민족주의에 대항하는 다양한 역사 해석이 제시되며 합종연횡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이런 역사관의 ‘백화제방’(百花齊放)이 자칫 폭력에 의해 위협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학문적 저술과 토론을 물리적으로 억압한다면 우리 사회가 아직 성숙하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것밖에 안 된다.
이번 사태를 보도하는 일부 언론의 자세도 문제다. 한 좌파 신문은 대안교과서 시안에 대한 제대로 된 검토 없이 “교과서포럼은 일본의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의 복사판”이라고 단정했다. 이런 행태는 국민의 반일 정서에 호소해 자기와 다른 사관을 공격하려는 정치 선동으로 볼 수밖에 없다.
교과서포럼은 이번 사태로 그들이 내놓으려는 ‘대안’이 과연 무엇인지 치열한 내부 토론을 거쳐야 할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어느 한쪽에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보다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근현대사 교과서를 만들어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들의 대안교과서 역시 ‘사관 전쟁’에서 살아나기 힘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