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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1일자 오피니언면 '조선데스크'란에 이 신문 이항수 사회부 법조팀장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가장(假裝) 혼인과 가장 사표 조선족 여성 김모씨는 1995년 10월 흑룡강성에서 한국인 남성 이모씨와 결혼사진을 찍고 현지에서 혼인신고를 했다. 두 사람은 중국의 혼인신고서를 토대로 이씨가 사는 한국의 군청에 혼인신고만 한 뒤 헤어졌다. 이듬해 두 사람에 대해 대법원은 “부부관계를 맺을 의사가 없이 국내취업 입국을 가능하게 할 목적의 형식적인 혼인이기 때문에 죄책을 면할 수 없다”면서 징역형을 선고했다. 법률용어로 ‘가장(假裝)혼인’인 이런 행위에 대해 법원은 일관되게 엄벌해 왔다.
헌법 전문가인 이석연 변호사는 20일 “청와대 지시에 따라 전효숙씨가 재판관직 사표를 냈다가 다시 임명 절차를 밟는 것은 가짜로 사표를 낸 ‘가장(假裝) 사표’”라며 “가짜 혼인신고서를 낸 ‘가장 혼인’과 뭐가 다르냐”고 했다.
전씨는 올 8월 중순 노 대통령과 독대한 뒤 “사표를 내라”는 민정수석의 연락을 받고 곧바로 사표를 내고 수리돼 무직자다. 이후 전씨 문제는 “헌법재판소장은 헌법재판관 중에서 임명한다”는 헌법조항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두 달 넘게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국회가 20일까지 전 후보자에 대한 헌법재판관 인사청문 경과보고서를 보내지 않아 노 대통령은 21일 이후에는 언제든 전 후보자를 재판관에 다시 임명할 수 있다. 여당은 “전씨가 다시 현직 재판관이 되면 절차적 문제는 해소된다”는 논리를 만들어 찬반투표를 강행할 태세다.
그러나 전씨가 재판관을 거쳐 소장에 임명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우선 헌법상의 문제다. 내년 말에 대통령이 지명한 재판관 2명에게 사표를 내게 하고 다시 이들을 임명하거나 새로운 2명을 임명한다고 가정해 보자. 노 대통령이 아니라 다음 대통령 때 이런 일이 일어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임기 5년인 차기 대통령은 새로 임기 6년의 임명장을 받은 재판관들을 교체할 기회마저 빼앗긴다. 한수웅 홍익대 교수(헌법학)는 “대통령이 전씨를 사퇴시켰다가 다시 재판관에 임명한다면 이는 차기 대통령의 재판관 임명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면서 “임명 순간부터 헌법 위반”이라고 했다.
헌재의 위상 실추도 문제다. 헌재는 대법원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해 왔고, 재판관도 대법관과 동등하게 예우하고 있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43)는 “전씨는 현 대법원장보다 사법시험으로 18회나 아래인 까마득한 후배”라면서 “전씨가 ‘수천명의 법조인 중 나 이외에는 헌재소장감이 없다’거나 ‘대법원장과 동등하게 대접해 달라’고 우선 법조인들부터 설득할 수 있는지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전씨에 대한 기피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전씨는 행정수도 위헌소송 사건에서 유일하게 각하 결정을 내렸고, 동의대 방화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는 결정을 내리는 등 현 정부와 코드를 맞춰 왔다. 이 때문에 소장 후보에 올랐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당장 사립학교법 위헌 소송을 낸 한 변호사는 “전씨가 다시 재판관이 되면 재판의 공정성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전효숙 기피신청’을 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전씨는 ‘최초의 여성 헌재소장’이라는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새로운 갈등과 분란의 불씨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대통령이 임명을 취소하거나 전씨가 자진사퇴하는 게 가장 멋진 해결방법이라고 말하는 법조인이 많다. 선택은 대통령 또는 전씨에게 있고 그 시간은 짧다. 이항수·사회부 법조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