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5일자 오피니언면 '태평로'란에 이 신문 신효섭 논설위원이 쓴 '김 의장, 국민만 보고 가시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사람이 달라졌다.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 얘기다. “답답하다.” “말은 세게 하는데 행동은 뜨뜻미지근하다.” 그동안 나온 주변의 평가다. 그는 얼마 전 민주당 조순형 의원에게서 “민주화 운동하고 고문도 받은 사람이 왜 제 할 말을 못하는지 모르겠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김 의장 자신이 이런 말을 듣게 했다. 김 의장측은 2004년 개각 때 “통일부장관 아니면 안 한다”고 했었다. 그러다 청와대가 정동영씨에게 그 자리를 주자 별 말 없이 복지부장관을 대신 받았다. 김 의장은 2004년 6월 대통령을 향해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논쟁해 보자”고 했었다. 대통령이 아파트 분양원가를 공개하려는 여당에 대해 “장사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고 면박을 주자 나온 반발이었다. 그러나 치열한 논쟁은 없었다. 지난달 초에는 소속 의원들이 김병준 교육부총리 임명을 반대하는 상황 속에서 대통령을 만나고서도 아무 제지를 하지 않아 뒷말을 듣기도 했다.

    이랬던 김 의장이 달라졌다. 그는 지난 2일 공개적으로 김 부총리의 자진사퇴를 촉구해 관철했다. ‘문재인 법무장관설’이 퍼지자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못을 박기도 했다. 결정판은 지난달부터 꺼내 든 ‘김근태판(版) 뉴딜’이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재계·노동계와 대타협을 추진하겠다”는 내용이다. 기업에는 출자총액제 폐지, 기업 총수 사면, 대기업 경영권 보호 조치 등을 약속했다. 재야운동권 출신 김 의장의 입에서 이런 친(親)재계적 발상들이 쏟아져 나온 건 뜻밖이었다. 김 의장으로선 자신은 물론 이전의 당의장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겠다고 나선 셈이다. 김근태만의 ‘블루오션’(경쟁자가 없는 새로운 사업영역)을 선보인 것이다.

    청와대와 정부는 대통령이 김 의장을 앞에 앉혀 놓고 “(뉴딜이) 당 정체성과 맞는다고 보느냐”고 했을 정도로 반응이 싸늘하다. 그런데도 김 의장은 “이것 말고는 길이 없다는 생각으로 결단했다. 청와대·정부와 조율되지 않아도 당이 먼저 저지르고 나가겠다”고 한다. 청와대 눈치 보지 않고 민심만 보고 가겠다는 ‘정치적 독립선언’처럼 들린다.

    열린우리당은 지난 2년 동안 다섯 차례 선거에서 모두 졌다. 정권의 정치·정책·인사 모든 것이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결과다. 김 의장 자신이 지난 5월 당의 지방선거 패배 후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이런 그가 이전 당의장들처럼 국민이 아니라 청와대만 보고 가겠다고 했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연이 어떻든 간에 국민은 김 의장의 변신(變身)을 반가워하는 것 같다. R&R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지지도는 26.3%(7월 11일)에서 23.1%(1일)로 떨어졌지만 열린우리당의 지지도는 13.8%에서 15.4%로 올랐다. 김 의장 개인의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도 1.7%에서 2.7%로 늘었다. 김 의장이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더 나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솔직히 국민의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불안하다. 당장 대통령이 이번 8·15 특사에서 김 의장의 재계 사면 요청을 들어주지 않자 “김 의장이 제풀에 주저앉는 것 아니냐”는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김 의장이 잘 나가면 나가는 대로 “김 의장이 어느 시점에 가면 재야운동권 체질로 회귀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김 의장이 좀 더 치밀하고 현실적인 구상으로 청와대와 정부까지 자기 편으로 만드는 리더십과 정치력을 갖췄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모두 김 의장이 이제부터 스스로 풀어 가야 할 숙제들이다.신효섭·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