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8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대중 고문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우리의 역대(歷代) 총선거 또는 대통령 선거에서 세금이 크게 쟁점화된 적이 없었다. 우리의 경제 규모가 계속 커져 가는 과정에 있었고, 국민의 담세율도 높은 수준이 아니었기에 국민들이 세금을 피부로 느낄 수 없었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 세금은 부유층 또는 고소득층의 관심사이고 저소득층은 관계없는 일로 여겨 세금에 관한 논의는 대체로 기피의 대상이었던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도 세금을 따질 때가 됐다. 세금문제를 쟁점으로 삼아 정권을 선택할 필요성이 생겼다. 무엇보다도 현 집권당이 먼저 세금을 쟁점화하고 있는 만큼 우리는 ‘세금=부자들 문제’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그래, 세금을 얼마나 올리겠다는 것이며 무엇에 어떻게 쓰겠다는 것이냐” “국민의 총체적 빚은 얼마이며, 예산의 균형문제는 어떻게 돼가고 있는가?”를 묻고 따지자는 것이다.

    더구나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나서 “상위 20%의 소득 계층이 근로소득세의 90%를 내고 있어 근소세를 올리더라도 20%를 제외한 나머지(80%)는 손해볼 것이 없다”며 납세 계층을 이분법적으로 갈라놓는 마당에 그것을 ‘대통령의 말’이라고 그냥 얼렁뚱땅 넘어갈 것이 아니라 내용의 왜곡 여부를 따지고 시비를 가려야 한다. 대통령이 말했다고 해서, 정부가 내놓은 자료라고 해서 덮어놓고 인정할 것이 아니라 전문가, 야당 정치인, 언론 등이 나서 그 자료의 진부를 가려 국민의 눈과 귀를 열어줄 필요가 있다.

    담세율만 해도 정부는 북유럽 등 복지국가의 국민들이 소득의 40~45%를 내는데 우리는 20%에 불과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을 왜곡한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이들의 세금은 사회보장제도에 따른 연금과 보험 등을 합친 것이며, 독일의 경우 연금과 보험을 빼면 실질적인 세금 즉 담세율은 우리와 비슷한 21% 수준이라는 것이다. 독일은 그 돈으로 대학까지 무상으로 공부시킨다. 노 대통령이 언급한 ‘20% 상위 소득층’ 도 따지고 보면 연봉 2500만원의 봉급생활자까지 거기에 포함되는 불합리성을 안고 있다.

    근로소득세뿐 아니라 8·31부동산대책의 일환으로 제기되고 있는 세제(稅制)도 그것이 과연 효과적인 정책일 수 있는가를 따져야 한다. 정부가 잘못된 정책을 밀어붙여 놓고 정부를 “우습게 보지 말라”는 식으로 윽박지르며 겁주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이제 유권자는 따져 봐야 한다. 양극화를 정권 말기의 화두로 내걸고 그것을 정치 쟁점화해서 과거 정권 및 기업과 기득 세력의 ‘약육강식’의 결과라고 몰고 가는데 그것도 이 정권의 실책을 호도하는 것이 아닌지 이제는 유권자가 나서서 심판해야 한다.

    노 대통령과 현 집권 세력이 어차피 강남 사람, 서울대 출신 그리고 20% 상위 소득 계층은 자기들 찍을 사람들이 아니라고 보고 그들을 내침으로써 강남 아닌 사람들, 서울대 아닌 사람들 그리고 20% 이외의 소득 계층의 표를 노리는 전략적 포석으로 세금문제, 사회문제, 양극화문제 등을 제기하는 것이라면 이는 사회 전체를 대립과 갈등 구조로 끌고가 거기서 득(得)을 보려는 무도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국민 개세(皆稅)의 원칙으로 가야 한다. 모든 국민이 자신의 소득에 따라 세금을 내되 소득이 많은 사람이 누진적으로 더 내는 것이 공평의 원칙에 맞는다. 정부가 고소득층의 돈(세금)만 걷어 가거나 걷어 간 돈을 저소득층에 나눠주는 ‘활빈당’(活貧黨)식의 발상은 위험하다. 세금을 개세원칙에 따라 걷되 그렇게 해서 거둔 예산을 복지와 빈곤 구제라는 정책적 차원에서 제도적으로 배분해야지, 세금을 ‘누구는 손해보고 누구는 손해 안 보는’ 식으로 권력자가 시혜(施惠)하듯이 다뤄서는 안 된다.

    선진국가들에서는 정권을 가름하는 주요 선거가 어김없이 조세정책, 균형예산문제와 실업문제를 가지고 치러진다. 이념적 갈등이나 정치적 민주화의 문제가 예각화될 수 없기에 유권자의 ‘주머니’와 관계되는 실생활의 문제가 당연히 쟁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 나라의 정당들은 실업, 세금과 경제정책을 쟁점으로 해서 정권을 다투며 유권자는 감세와 증세, 기업 육성과 사회복지 사이를 저울질해서 판단하는 지혜를 발휘하고 있다. 이제 유권자는 권력자들이 세금 가지고 원칙 없이 장난치면 혼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