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양쑥부쟁이 죽을까 걱정만 하나요? 대한민국 지켜낸 미군 장군의 정신도 배우세요.”

    지나가는 한국사람을 잡고 6.25하면 떠오르는 미국 장군이름을 대 보라고 해 보자. 아마도 십중팔구는 맥아더 장군을 얘기할 것이다. 맥아더 장군. 공산군에 밀려 낙동강까지 패퇴하여, 국가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있던 대한민국을 살려낸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냈으니 당연한 일이다.

  • ▲ 무어 장군의 추모전적비. 임시로 옮기기 전.ⓒ 이오봉 기자
    ▲ 무어 장군의 추모전적비. 임시로 옮기기 전.ⓒ 이오봉 기자

    그럼 6.25때 전사 또는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미군장군은? 아마도 일부는 의정부에서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8군사령관 워커(Harris Walton Walker:1889~1950, 아래 박스기사 참조) 중장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미군 9군단장이었던 무어(Bryant E. Moore:1894~1951) 소장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무어장군은 워커 중장의 교통사고 두달 뒤 경기도 여주에서 헬기 추락으로 숨졌다.

    무어장군의 죽음은 미군의 중공군에 대한 대 공세작전인 ‘킬러작전’과 관계가 있다. 킬러작전은 중공군의 2월 대공세에 대한 유엔군의 반격이다. 중공군의 대공세와 킬러작전의 과정은 이렇다

    51년 2월 중동부 전선의 미10군단과 국군3군단이 홍천 및 서울~강릉간 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실시한 ‘라운드업’ 작전이 끝나는 시점 상대적으로 취약한 이 지역에서 중공군의 대공세를 받았다. 이른바 중공군의 ‘2월 공세’다.

  • ▲ 공사 현장사무소로 임시로 옮긴 추모전적비. ⓒ 이오봉 기자
    ▲ 공사 현장사무소로 임시로 옮긴 추모전적비. ⓒ 이오봉 기자

    중공군의 공격으로 국군8사단은 약 8000명, 국군3·5사단은 각각 3000명의 병력 손실을 입었고, 네덜란드군은 대대장(중령 오우덴)이 전사하는 불운을 겪었다. 戰史에서는 수많은 유엔군이 전몰한 이곳 횡성 서북 쪽의 협곡을 ‘학살의 골짜기’로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2월 공세를 통해 횡성에서 미2사단과 국군 3개 사단에 막대한 타격을 준 중공군은 중부전선의 교통 요충지인 경기도 양평 지평리의 미23연대를 섬멸하려고 공격해왔다.

    하지만 미23연대장 프리먼 대령과 미23연대에 배속된 프랑스의 몽클라 중령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중공군 3개 사단의 포위에 굴하지 않고 부대를 지휘하여 적을 격퇴했다. 당시 미군이 2월 13일부터 16일까지 원형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치러낸 이 격전이 유명한 ‘지평리 전투’다.
    3일 동안 완전히 포위된 미군 23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포위 3일째인 2월 16일에 미국 1 기병사단 5 기병연대 3대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크롬베즈 특별임무부대에 의해 구출되었고, 중공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중공군은 지평리에서 첫 패전의 쓴맛을 봤다. 지평리 전투를 계기로 중공군의 2월 공세를 물리친 미8군은 적에게 휴식과 재편성의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야심찬 공세작전을 계획했다. 이 작전이 킬러작전(Operation Killer)이다.

    킬러작전은 리지웨이 사령관이 원주~제천~영월 전선을 회복하고, 공산군을 격멸하기 위한 작전으로 중공군 개입 이후 미8군이 군 차원에서 실시한 최초 공세작전이다.

    킬러작전 중동부 전선의 미9군단·미10군단이 주공을 맡고, 서부의 미1군단과 동부의 국군3군단은 양쪽에서 엄호임무를 맡았다. 이 작전은 51년 2월 21일 개시됐다. 이에 주공인 미9군단·10군단은 양평~횡성線으로 진격했다. 이 작전으로 서부전선을 맡은 미 1군단의 25사단은 남한산성 쪽을 공격했다. 미 3사단은 의정부를 향하면서 지금의 광진교가 있는 한강 남안의 동쪽을 맡았다. 중부 전선을 맡은 미 9군단과 10군단은 팔당과 양평, 횡성을 잇는 선으로 진격했다. 미 해병 1사단도 원주에 도착해 전투에 나섰다.
    횡으로 강하게 연결된 아군이 공세를 벌인 ‘킬러 작전’ 이후 중공군은 계속 북으로 밀려갔다.

    그러나 이 작전 초기 주공 미9군단의 군단장 무어(Moore) 소장이 도하작전 지휘, 정찰을 위해 탑승한 헬기가 고압전선에 걸리는 바람에 여주 근처한강에 추락한 것이다. 1951년 2월 24일이다. 킬러작전은 무어 장군의 전사와 겨울비 등으로 기동이 잠시 주춤하기도 했다.

    1894년  6월 6일 미국 메인 주에서 태어난 무어장군은 8군사령관 리지웨이와 미국 육사 동기였다. 리지웨이가 8군사령관에 부임하면서 추천한 네명의 군단장 후보중 가장 유능한 인물이었다. 2차세계대전 중에는 유럽에서 연대장,사단장을 지냈고, 전후엔 미국 국방부 공보처장, 육사교장을 겨쳤다. 6.25때는 51년 1월 31일 부임, 3주만에 첫 작전에서 아깝게 전사한 것이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무어장군의 흔적을 전해주는 전공 기념비라 할 전적비가 경기도 여주시 여주읍 신진리에 있다. 이 비는 1951년 10월 주한미군이 세운 것으로, 4대강 살리기 공사가 시작되면서 지난 3월 공사를 위해 이 공구 시공을 맡은 현대건설 현장사무소로 잠시 옮겨졌다.

  • ▲ 무어장군 전적비 비문. ⓒ 이오봉 기자
    ▲ 무어장군 전적비 비문. ⓒ 이오봉 기자

    ‘미군 9군단장 브라이언드 E 무어 장군을 추모하며. 1951년 2월 24일 戰死’
    소장 계급인 별 두 개가 선명하게 찍힌 이래 영문으로 씌어진 비문을 보면 가슴이 울려 온다.

    “여기 남한강변 외롭지만 우뚝 높이 서 있는 이 전적비는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주의 집단의 남침으로부터 세계평화와 자유, 대한민국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그 어느 누구도 재현하지 못할 오직 자기 희생의 강인한 군인 정신과 사명감으로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다 전사한 위대한 전쟁영웅이신 고 미육군소장 브라이언트 에드워드 무어 장군의 영혼이 잠들고 있는 곳이다”

    전적비 옆 안내판에 새겨진 글귀에도 이국 땅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산화한 장군의 고결한 정신이 그대로 전해진다. 

    박성순 수자원공사 강천보 건설단장은 “우리도 공사를 맡기전 이런 분이 있는지 몰랐다”라며 “임시 이전이지만 추모비 근처의 나무들까지 그대로 옮겨와 최대한 장군에 대한 예를 갖췄다”고 밝혔다.
    이 비가 임시로 옮겨진 현장사무소엔 보훈의 달을 맞아 재향군인회, 무공수훈자회 등이 자주 찾고 공사 관계자들이나 현장 방문자들은 잠시 발길을 멈추고 59년 전에 산화한 무어장군을 추모하고 있다.
    박성순 건설단장은 “강천보 공사와 주변 생태공원과 관리센터등 공사가 마무리되면 잘 조성된 공원의 한쪽에 그의 추모비가 제 자리를 찾게 될 것”이라며 “그 때가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장군의 기리게 될 것”이라고 기대를 나타냈다.

     



    ◆워커 장군.

  • ▲ 워커장군 ⓒ 뉴데일리
    ▲ 워커장군 ⓒ 뉴데일리

    워커 장군은 6.25전챙 초반 경북 영덕에서 마산까지 이어지는 약 240km의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 발판을 마련한 장본인이다. 당시 전황이 불리해지자 당시 상주를 지키던 미군 제 25사단장이 철수 명령을 7월 29일 내렸다. 이에 미8군사령관이었던 워커 장군은 그날 바로 현지로 가 ‘죽음으로 지키라’며 전선 사수 훈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우리는 지금 시간과 싸우고 있다. 북한군이 먼저 부산을 점령하느냐, 아니면 맥아더 원수가 보내기로 한 증원군이 먼저 도착하느냐의 문제다. 부산까지 후퇴한다는 것은 사상최대의 살육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치의 땅이라도 적에게 양보하는 일은 수천명 전우의 죽음에 보답하는 길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어찌보면 워커 장군이 낙동강을 막아줬기에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더 역사에 빛을 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워커 장군은 1950년 12월 23일, 중공군을 막아내는데 공을 세운 자신의 외아들 워커 대위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수여하는 훈장을 전달하기 위해 가던 중 의정부 근처에서 교통사고로 삶을 마쳤다. 주한미군 휴양시설이 있었던 서울 광진구 광장동의 언덕이 워커힐로 된 것도 이런 연유이다.

    당시 워거장군의 아들이었던 샘 워커 대위도 우리나라엔 아버지 못지 않은 무게로 다가온다. 당시 워커대위는 아버지의 전사 소식과 함께 본국으로 가라는 맥아더 장군의 말에 “후퇴중인 부대를 다른 중대장에게 맡길 수 없다”며 거부하다, 결국 맥아더 장군이 “이건 명령이야”라고 하는 바람에 고인이 된 아버지를 모시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워커 대위와 한국의 인연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주한 미8군 초대사령관이었던 아버지에 이어 父子 대장이면서 미국 육군 사상 최연소 대장진급자였던 전도유망한 샘 워커 장군은 지미카터 미국대통령이 주한 미군을 철수시키려는 정책을 반대하다 옷을 벗었다고 한다. 당시 주한 미8군 참모장 존 싱그러브 소장이 철수를 반대하다가 군을 떠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나, 워커장군의 아들 샘 워커 장군도 그랬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한편 6.25전쟁 때 워커 장군을 죽게 한 트럭 운전병을 이승만 대통령이 사형시키려 할 때 미군 참모들이 적극 만류해 사형을 면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