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장 첫 주말 가족·외국인 발길 이어져참전용사 이름 빼곡한 지하홀도 눈길세금 낭비 논란에도 긍정적 평가 쏟아져
  • ▲ 석양이 내리기 시작한 광화문광장. 높이 6.25m의 검은 화강암 기둥 23개 사이로 분홍빛 노을이 번지고 있다. ⓒ김보연 기자
    ▲ 석양이 내리기 시작한 광화문광장. 높이 6.25m의 검은 화강암 기둥 23개 사이로 분홍빛 노을이 번지고 있다. ⓒ김보연 기자
    #. "제 친구 할아버지께서 한국전쟁에 참전하셨다가 돌아가셨는데 지하 공간 미디어월 안에 이름이 있는 거예요. 사진 찍어서 친구한테 보내줬더니 친구가 너무 좋아했어요. 저도 정말 뿌듯했고요."

    지난 주말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만난 50대 네덜란드 여성 캐롤씨는 도슨트 투어를 마치고 나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밤에는 조명이 더 화려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은은했다"며 "하지만 애도를 표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는 오히려 그 분위기가 더 잘 맞는 것 같았다"고 했다.

    지난 12일 광화문광장에 문을 연 '감사의 정원'은 한국전쟁 참전국에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개장 첫 주말 기자가 지상 조형물부터 지하 프리덤홀, 야간 경관까지 둘러본 이곳은 단순한 광장 조형물이 아니라 전쟁의 기억과 감사의 의미를 차분히 따라가도록 설계된 도심형 추모 공간에 가까웠다.

    ◆ 개장 첫 주말 가족·외국인 발길 이어져"와보니 달랐다"

    석양이 내리기 시작한 광화문광장. 높이 6.25m의 검은 화강암 기둥 23개 사이로 분홍빛 노을이 번지자 '감사의 빛 23' 앞에는 가족 단위 방문객, 외국인 관광객, 인근 직장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각 기둥 측면에는 해당 참전국 언어로 새긴 시와 문학 글귀가 새겨져 있다. 영어, 프랑스어, 터키어, 에티오피아어까지. 글자를 읽지 못해도 손으로 짚어보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기둥들이 그냥 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방문객은 많지 않다. 조형물들은 각 참전국 현지에서 직접 채굴하거나 기증받은 석재로 만들어졌다. 네덜란드, 인도, 그리스 등 기증에 동의한 참전국의 돌이 지금 광화문에 서 있다. 조형물 하단에 새겨진 QR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해당 국가의 참전 역사와 상세 정보가 펼쳐진다.

    팸플릿을 통해 독일 기둥의 내력을 알게 된 방문객은 발걸음을 멈췄다. 독일 기둥에 사용된 석재 일부는 베를린 장벽에서 기증된 것이다. 냉전의 상징이었던 그 벽의 파편이 지금 광화문에서 자유와 연대의 상징으로 서 있다. 독일 출신 20대 A씨는 "터키 정도만 참여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나라가 참여했었는지 몰랐다"며 "정말 멋있다"고 했다.

    "언론에서 안 좋은 얘기가 많았잖아요. 근데 생각보다 광장을 크게 차지하지도 않으면서, 외국인이 많이 찾는 광화문에서 자기 나라 국기 있으면 되게 반가워할 것 같고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잘 꾸며놓은 것 같아요." 서울에 사는 20대 대학생 B씨의 말이었다.

    도시계획학과에 재학 중인 20대 C씨도 같은 생각이었다. "직접 와보니 민주당의 비판은 부풀려진 게 많은 것 같아요. 위에 돌탑만 해서 200억이라고 하면 엄청난 것처럼 들리지만 지하까지 있는 복합공간 전체 예산인데 외국인이 많이 방문하는 광화문광장에 도시계획적으로 이런 상징 공간 사업을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스타그램을 보고 31살 딸과 함께 찾아온 50대 주부 D씨는 "사람들이 이곳을 많이 모른다는 게 아쉬울 뿐"이라며 "한 번쯤 역사의 공간을 방문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 ▲ 감사의 정원 지하 프리덤홀로 내려서는 순간 정면과 측면을 채운 대형 미디어월이 펼쳐진다. ⓒ김보연 기자
    ▲ 감사의 정원 지하 프리덤홀로 내려서는 순간 정면과 측면을 채운 대형 미디어월이 펼쳐진다. ⓒ김보연 기자
    ◆ 돌기둥 아래 숨은 추모 공간…참전용사 이름 빼곡한 지하홀

    감사의 정원은 지상 조형물만으로는 전체 모습을 알기 어렵다. 기둥 사이 유리 브릿지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면 지하에 조성된 '프리덤홀'이 열린다. 계단 양옆에는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무료가 아니다)'와 '도움받은 나라에서 도움주는 나라로'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내려서는 순간 정면과 측면을 채운 대형 미디어월에는 22개 참전국의 영상과 이미지가 교차하며 흐른다. 검은 패널 벽면 가득 참전용사 이름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고 그 뒤로 '자유 FREEDOM  희생 SACRIFICE  감사 GRATITUDE 평화 PEACE' 네 단어가 한영 병기로 쓰여 있다. 공간은 한눈에 들어오는 아담한 규모지만 그 안을 채운 밀도는 가볍지 않다. 방문객들은 대부분 말을 줄이고 천천히 걸으며 벽면을 읽는다.

    캐롤씨가 친구 할아버지의 이름을 찾은 곳도 이 미디어월에서였다. 지하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상만 둘러보고 돌아간 방문객이 적지 않다. SNS에서도 "지하가 있는 건 몰랐다"는 후기가 잇따르고 있다.

    58년생 서울 거주 E씨는 "우리나라를 도와준 나라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좋다"면서도 "전시실도 몇 군데 있고 내용물이 많이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작긴 하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초등학교 2학년 쌍둥이 아들을 데려온 30대 아버지는 "교과서는 제한적이고 쓴 사람의 주관이 들어갈 수 있다"며 "이런 공간에서 아이들이 자료를 직접 보고 이런 사실이 있었다는 걸 알았으면 해서 데리고 왔다"고 했다. 아이들 반응을 묻자 "'한국이 못 살았는데 잘 살게 됐구나' 하더라고요"라고 전했다.

    지하 공간은 광화문역, KT빌딩, 세종문화회관 지하와 연결된다. 사계절 내내 운영 가능한 구조다.

    ◆ AI 군복에 미디어아트까지…예상 못 한 즐길거리

    지하 프리덤홀 안쪽 AI 군복 체험 부스에는 데이트를 나온 연인들의 줄이 이어졌다. 터치스크린 키오스크에서 22개 참전국 국기 중 원하는 나라를 고르기만 하면 된다. 카메라가 얼굴을 인식하고 5초 뒤 그 나라의 6·25 당시 군복을 입은 합성 사진이 완성된다. QR코드로 스마트폰에 무료로 저장할 수 있고, 완성된 사진은 전시장 벽면에 실시간으로 올라가 다른 방문객들과 공유된다.

    "일부 언론 보도와 달리 와보니 전혀 문제없다고 생각해요. AI 군복 체험도 재미있고, 조명 아트가 기대돼서 해 질 때까지 주변 둘러보다가 이따 보고 가려고 해요." 20대 커플이 말했다.

    야간 레이저 조명은 매일 오후 8시부터 11시까지(동절기 오후 7시~10시), 매 30분마다 10분씩 기둥 꼭대기에서 하늘을 향해 빛을 쏘아 올린다.

    ◆ "잊혀진 전쟁"을 기억하는 외국인들

    광화문광장은 외국인이 꼽은 서울 1위 랜드마크다. 네덜란드에서 온 28살 필리핀씨는 처음에는 이곳이 한국전쟁과 관련된 공간인지 몰랐다고 했다. 그는 "그냥 국기들을 지나쳐 걷다가 네덜란드 국기를 발견했고 설명문을 읽었어요. 제2차 세계대전의 그늘에 크게 가려져 있기 때문에 유럽에서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어요. 광화문 랜드마크에 감사의 정원을 설치해 한국전쟁을 보여주는 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미국에 거주하는 70대 부부는 친지 방문차 한국에 왔다가 들렀다며 "문화와 평화를 위해 먼 길에서 와 희생한 이들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감사의 뜻을 전하는 건 좋은 일"이라고 했다. "기념할 수 있도록 형상화한다는 자체가 뜻깊고 의미있는데 언론에서 안 좋은 점이 많이 부각되는 것 같아 아쉽다"는 말을 보탰다.

    서울에 거주하는 70대 남성은 한 바퀴를 둘러보고 나서 "우리가 이렇게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준 분들에 대한 보답"이라며 "광화문광장에 볼거리를 더 많이 설치해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면 좋겠다"고 바랐다.

    지상 조형물 사이에서는 한 어르신이 유독 오래 머물렀다. 1944년생으로 부천에 산다는 유재남씨는 23개 기둥을 하나하나 손으로 어루만지며 천천히 걸었다. 기둥마다 멈춰 서서 새겨진 글귀를 읽고, 조용히 경례를 올렸다. 한 기둥 앞에서, 또 다음 기둥 앞에서 같은 동작이 이어졌다.

    그는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이다 보니 이곳에 와서 나를 돌아보게 됐다"며 "우리나라 평화를 위해 도와준 참전 군인들에게 마음속으로 항상 감사하게 경례를 올린다"고 말했다

    가장 마음에 남는 조형물로는 베를린 장벽 석재가 쓰인 독일 기둥을 꼽았다. 그는 "독일은 장벽을 넘어 통일을 이뤘다는 점이 감동적"이라며 "한국은 아직 그렇게 되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어 안타깝다"고 했다.
  • ▲ 한 SNS에는
    ▲ 한 SNS에는 "목포의 세월호 기억관 2800억, 잼버리 3600억인데 감사의 정원 200억을 깐다고?" 라는 댓글에 수십 개의 공감이 달렸다.ⓒSNS 캡쳐본
    ◆ 온라인 비판과 현장 사이…평가가 갈리는 이유

    감사의 정원 조성비는 207억원이다. 이 비용에는 지상부 23개 석재 조형물뿐 아니라 각국 현지 채굴 석재 공수, 각국 언어 글귀 조각, 유리 브릿지, 야간 레이저 조명 시스템, 지하 프리덤홀, 대형 미디어월, AI 체험 공간, 세종로공원 종합정비, 광화문역 연결 지하통로 등이 포함됐다.

    온라인에서도 현장 방문 이후 평가가 달라졌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일부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지상 조형물만 보고 판단할 공간이 아니었다", "지하 프리덤홀을 보고 나니 취지를 이해하게 됐다"는 취지의 글이 올라오고 있다. 

    세월호 기억관 조성 예산과 비교하며 감사의 정원 예산을 둘러싼 비판이 과도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 SNS 이용자는 "세월호 기억관은 2800억원 규모로 추진되는데 감사의 정원 207억원만 문제 삼는 것은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취지의 글을 올렸고 여기에 공감하는 댓글도 이어졌다

    감사의 정원은 광화문역과 KT빌딩, 세종문화회관 지하와 이어져 있어 계절과 날씨에 관계없이 찾을 수 있다. 지상에서는 광화문광장을 걷다 자연스럽게 기둥 사이로 들어서고, 지하에서는 미디어월과 참전용사 이름을 따라 전쟁의 기억을 마주하는 구조다. 여기에 야간 조명까지 더해지면서 낮과 밤의 표정도 달라진다.

    밤이 깊어지자 광화문광장 위로 레이저 빛이 다시 올라갔다. 기둥 사이를 걷던 사람들은 자리를 쉽게 뜨지 않았다. 사진을 찍는 이들도 있었고 벽면의 글귀를 다시 읽는 이들도 있었다. 유재남씨는 마지막 기둥 앞에서 한 번 더 손을 올렸다. "마음속으로 항상 감사합니다." 광화문 한복판의 새 공간은 그렇게 전쟁의 기억을 조용히 붙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