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데코 여왕' 민낯 보다…"평범한 사람이 만들어낸 비범함, 그 모순이 매력"'타마라 드 렘피카' 생애 그린 뮤지컬, 6월 21일까지 코엑스 아티움 우리은행홀
  • ▲ 뮤지컬 '렘피카'에서 주인공 타마라 드 렘피카 역을 맡은 배우 김선영.ⓒ서성진 기자
    ▲ 뮤지컬 '렘피카'에서 주인공 타마라 드 렘피카 역을 맡은 배우 김선영.ⓒ서성진 기자
    "부상으로 절망했던 순간, 저를 일으킨 건 '렘피카'였습니다. 생존을 위해 투쟁했던 그녀처럼, 저 역시 배우로서 무대 위에 살아남기 위한 여정을 지나왔거든요."

    뮤지컬 배우 김선영이 더 단단해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김선영은 한국 초연 중인 뮤지컬 '렘피카'의 주인공 타마라 드 렘피카(1898~1980)의 삶을 복기하며 자신의 내면을 덤덤히 꺼내 보였다.

    '아르데코(장식미술)의 여왕'이라 불리며 20세기 초 유럽 미술계와 사교계를 풍미한 렘피카는 신여성의 상징이자 양성애자, 시대의 욕망을 투영한 화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김선영은 그녀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평범함'에 주목했다.
  • ▲ 뮤지컬 '렘피카' 공연 사진.ⓒ놀유니버스
    ▲ 뮤지컬 '렘피카' 공연 사진.ⓒ놀유니버스
    "처음부터 비범한 사람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타마라는 러시아 혁명으로 모든 것을 잃고 파리로 망명한 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붓을 든 인물입니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다 보니 독창적인 예술 세계가 열린 것이죠. 평범한 사람이 절박한 상황에서 만들어낸 그 비범함, 그것이 제가 표현하고 싶은 핵심이었습니다."

    김선영은 렘피카를 '복잡하고 모순적인 인물'로 정의했다. 순수한 예술적 열정뿐 아니라, 자신을 브랜드화하고 생존을 위해 선택을 거듭하는 모습이 이기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 "제가 연기하고 있지만 '이 여자 웃기다. 독특하다'고 생각했어요. 공연의 마지막 직전 '나를 화산 속에 뿌려줘. 난 다이아몬드가 되고 싶어'라는 대사가 가장 타마라스러웠어요. 관객들이 '저 인물은 왜 저럴까' 고민하며 머리 아파한다면 오히려 성공한 것이죠. 인물의 다층적인 면모를 보여주겠습니다."

    렘피카는 배우 그레타 가르보를 연상시킬 정도의 빼어난 미모로 자유분방한 사생활을 즐겼다. 우연히 만난 성매매 여성 라파엘라에게 반해 그녀를 연인이자 뮤즈로 삼아 '아름다운 라파엘라' 등 다수의 누드화를 남겼다. 이 강렬한 관계를 무대 위에서 시각화해 하는 작업 과정에서 김선영은 "두 사람의 치명적이고 관능적인 관계를 보여줘야 하다 보니, '표현의 수위'를 어디까지 가져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고 털어놨다.
  • ▲ 뮤지컬 '렘피카'에서 주인공 타마라 드 렘피카 역을 맡은 배우 김선영.ⓒ서성진 기자
    ▲ 뮤지컬 '렘피카'에서 주인공 타마라 드 렘피카 역을 맡은 배우 김선영.ⓒ서성진 기자
    "타마라에게 라파엘라는 단순한 모델 그 이상, 자신의 예술 세계를 완성해 준 영혼의 조각이었을 겁니다. 타마라가 라파엘라의 몸을 통해 발견한 예술적 영감, 두 사람 사이의 정서적 교감을 관객들에게 어떻게 설득력 있게 전달할지가 관건이었죠. 너무 과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뜨거웠던 사랑이 느껴질 수 있도록, 매 연습마다 동료 배우들과 합을 맞추며 최적의 선을 찾아내려 노력했습니다."

    이번 초연은 뮤지컬 '하데스 타운', '그레이트 코멧'을 연출한 레이첼 채브킨이 진두지휘한다. 작품의 가장 큰 줄기는 단연 음악이다. '더 뉴 우먼(The new woman)', '우먼 이즈(Woman Is)', '돈 뱃 유어 하트(Don’t Bet Your Heart)', '퍼펙션(Perfection)'으로 이어지는 넘버들은 현대적인 팝과 록, R&B 요소가 정교하게 결합돼 있다. 사실 타마라의 일대기 자체는 관객에게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흐름일 수 있다. 하지만 채브킨은 이를 평범한 서사극에 머물게 두지 않았다.

    김선영은 "이 이야기를 쉼 없이 몰아치며 음악과 무대, 조명을 하나로 묶어가는 연출력에 감탄했다. '하데스타운'과는 또 다른 차원의 대단함을 느꼈다. 연출, 무대, 조명의 메커니즘이 이토록 완벽하게 컨트롤되는 작품이 지구상에 몇이나 될까 싶을 정도"라며 채브킨의 세련된 연출을 극찬했다.
  • ▲ 뮤지컬 '렘피카'에서 주인공 타마라 드 렘피카 역을 맡은 배우 김선영.ⓒ서성진 기자
    ▲ 뮤지컬 '렘피카'에서 주인공 타마라 드 렘피카 역을 맡은 배우 김선영.ⓒ서성진 기자
    지난해 12월 집안에서 넘어져 오른쪽 팔꿈치가 완전히 골절되는 중상을 입은 김선영에게 이번 '렘피카'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작품이었다. "넘어지는 순간 '아, 나는 이제 끝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충격이 컸어요. 수술 후 재활에만 6개월이 걸린다는 진단을 받았죠."

    통깁스를 하고 지낸 고통의 시간 동안 그를 버티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작품이었다. 사고 이틀 전 프로필 촬영을 마친 것이 운명처럼 느껴졌다는 김선영은 깁스를 푼 지 단 이틀 만에 연습실로 향했다. 그는 "극 중 타마라가 생존을 위해 여정을 떠나듯, 저도 배우로서 살아남기 위한 시간을 보냈어요. 이 작품이 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면 재활은 훨씬 더디고 힘들었을 거예요"라고 밝혔다.

    이어 "배우 생활을 하면 할수록 대표님(송혜선)이 하셨던 말씀이 마음 깊이 와닿습니다. 작품과 배우가 만나는 것은 '운명' 같은 일이라는 것을요. 공을 들였지만 막판에 틀어지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 불쑥 찾아오는 배역도 있거든요. 단순히 타이밍만 맞는 게 아니라, 제 마음속에 확신이 차오르는 울림이 있어야 비로소 인연이 돼요"라고 덧붙였다.
  • ▲ 지난달 26일 NOL 씨어터 코엑스 우리은행홀에서 진행된 뮤지컬 '렘피카' 하이라이트 장면 시연.ⓒ뉴시스
    ▲ 지난달 26일 NOL 씨어터 코엑스 우리은행홀에서 진행된 뮤지컬 '렘피카' 하이라이트 장면 시연.ⓒ뉴시스
    공연에서 김선영은 실제 남편인 배우 김우형과 출연한다. 극 중에서도 부부인 '타데우스 렘피키' 역을 맡은 김우형과는 이미 '하데스타운'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2막에서 현실 부부처럼 격렬하게 싸우는 장면이 있어요. 개인적인 감정이 섞일까 걱정도 했지만, 결국 우리는 배우잖아요. 무대 위에서 정교하게 합을 맞추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더라고요."

    어느덧 데뷔 30년을 바라보는 50대의 여배우로서 김선영은 이제 관객에게 정답이 아닌 질문을 던지고 싶다고 전한다. "예전엔 권선징악 같은 확실한 답을 주려 했다면, 이제는 관객들이 저마다의 해석을 가져가길 바라요. 후배 여배우들이 '나도 렘피카 같은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만든다면 그것만으로 제 도전은 성공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뮤지컬 '렘피카'는 6월 21일까지 서울 코엑스 아티움 우리은행홀에서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