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5년만 연설서 유엔 질타 … "존재 목적이 뭐냐, 역할 못 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각) 5년 만에 유엔(UN)총회 연설에 나서 유엔 체제에 대한 깊은 불신을 드러냈다.

연합뉴스 등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미국 뉴욕의 유엔 본부에서 열린 제80차 유엔총회 고위급 회기 일반토의 연설에서 자신이 재취임 후 7개의 세계 분쟁을 해결했다면서 "내가 유엔을 대신해 이러한 일들을 해야 했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too bad). 모든 경우에서 유엔은 도움을 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난 이들 각국의 지도자들과 대화하며 7개의 전쟁을 끝냈지만, 협상 타결을 돕겠다는 유엔의 전화는 한 통도 받지 못했다"면서 "유엔으로부터 받은 건 오로지 중간에 멈춰버린 에스컬레이터였다. 고장 난 에스컬레이터와 텔레프롬터뿐"이라고 비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멜라니아 여사와 유엔 본부에 도착한 뒤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했으나, 도중에 멈춰 걸어 올라와야 했다고 한다. 또 연설 시작 때 연설문을 화면에 띄워주는 텔레프롬터가 작동하지 않자 유엔을 비난하는데 두 사건을 끌고 들어온 것이다.

유엔 체제에 대한 불신과 비난은 1시간가량 이어진 연설에서 지속해서 표출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엔이 분쟁 종식에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서 "그렇다면 유엔의 목적은 무엇이냐"고 반문한 뒤 "유엔은 거대한 잠재력이 있지만, 현재로선 그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들이 하는 것이라곤 강경한 어조의 서한을 보내는 것뿐이고, 그 뒤를 이어가는 작업은 전혀 없다. 공허한 말뿐인데, 공허한 말로는 전쟁을 해결할 수 없다. 전쟁과 분쟁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모두가 (내가 이룬) 이런 성과마다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내가 신경 쓰는 것은 상이 아니라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며 "일곱 개의 전쟁 (종식)으로 우린 수백만명을 구했고, 지금도 다른 전쟁들을 해결 중"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7개 전쟁은 △캄보디아와 태국 △코소보와 세르비아 △콩고와 르완다 △파키스탄과 인도 △이스라엘과 이란 △이집트와 에티오피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등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유엔은 해결해야 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해결해야 할 새로운 문제를 너무 자주 만들어내고 있다"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우리 시대 최대 정치적 현안인 통제 불능의 이민 위기"라고 주장했다.

유엔이 지난해 이민자들의 여정을 지원하는 예산을 3억7200만달러 편성했다는 점을 겨냥해 "유엔은 서방 국가들과 그들의 국경에 대한 공격을 지원하고 있다"며 "유엔은 불법체류자들에게 음식, 숙소, 교통편과 직불카드를 제공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모든 국가가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각자의 입장을 취할 것을 촉구한다"며 "여러분의 국가들이 파괴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불법이민자의 침입을 받는 유럽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종식하지 않으면 강력한 관세로 제재하겠다고도 공언했다.

그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관계가 항상 좋았기 때문에 중재가 쉬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 전쟁 때문에 러시아가 좋게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만약 러시아가 전쟁 종식을 위해 합의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미국은 매우 강력한 관세 조치를 단행할 준비가 완전히 돼 있다"며 "이는 유혈사태를 매우 신속히 종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만 이 관세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지금 이 자리에 모여있는 유럽 국가들 모두가 동일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유럽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지금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산 원유를 구입하고 있는 중국과 인도, 일부 유럽 국가들에 대해서는 전쟁자금을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중국과 인도는 러시아산 원유를 계속 구매함으로써 진행 중인 전쟁의 주요 자금원 역할을 하고 있다"며 "용납할 수 없는 건 심지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국가들조차도 러시아 에너지와 제품 수입을 크게 줄이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난 이 사실을 2주 전에 알고 매우 불쾌했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전쟁자금을 지원하는 것"이라며 "러시아와 싸우면서 러시아 원유와 가스를 구매하는 건 그들에게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들이 러시아로부터 모든 에너지 구매를 즉시 중단해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린다"며 "난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다. 오늘 여기 모인 유럽 국가들과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연설한 것은 1기 재임 시절인 2020년 이후 5년 만이다. 당시에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화상 연설이 진행됐고, 직접 연설은 2019년이 마지막이다.

통상 유엔총회 일반토의 연설은 대부분 국가가 참여하는 만큼 15분 내외로 진행하는 것이 관례다. 다만 이날 네 번째 연사로 오른 트럼프 대통령은 1시간 가까이 연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