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부 당시 美 의회 대상 로비 활동美 청문회서 "애국심에 비롯한 개인적 활동" 주장
  • ▲ 70년대 중반 워싱턴 정가에 파란을 일으킨 '코리아게이트'의 주역인 박동선 씨가 별세했다. 향년 89세. ⓒ연합뉴스 자료사진
    ▲ 70년대 중반 워싱턴 정가에 파란을 일으킨 '코리아게이트'의 주역인 박동선 씨가 별세했다. 향년 89세. ⓒ연합뉴스 자료사진
    박정희 정부 시절이던 1970년대 말 한미 관계에 마찰을 부른 '코리아게이트'의 핵심 인물인 박동선 씨가 19일 향년 89세로 별세했다. 박 씨는 지병을 앓던 중 상태가 악화돼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에 입원했다가 이날 오후 6시45분쯤 세상을 떠났다.

    코리아게이트는 박 씨가 미국 의회 주요 인사들을 대상으로 현금 수십만 달러를 제공하며 로비 활동을 해온 사실이 1976년 10월 24일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로 알려지면서 시작된 한미 간 외교 마찰 사건이다.

    당시 워싱턴포스트는 '박동선이라는 한국인이 한국 정부 지시에 따라 연간 50만~100만 달러를 미국 의원과 공직자 등에게 제공하고 매수공작을 벌였다'고 1면에 대서특필했다.

    박 씨는 1935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출생해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도미해 조지타운대를 졸업했다. 미국산 쌀을 한국으로 수입하는 사업을 하던 그는 1960년대 워싱턴DC에 사교모임 '조지타운클럽'을 만들어 미 정계 인사들과의 친분을 쌓았다.

    박 씨가 로비 활동을 했던 당시 박정희 정부는 북한 위협의 증가와 닉슨 독트린 등으로 인해 극심한 안보 불안에 빠져 있었다. 1969년 집권한 닉슨 행정부는 아시아 국가의 안보는 아시아 국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아시아 주둔 미군의 대대적인 감축에 돌입했다.

    1971년 주한미군 제7보병사단(2만 명 감축)과 3개 비행대대를 철수했고, 비무장지대 최전선에 배치된 '인계철선'의 상징이던 제2보병사단의 후방 이동을 강행했다. 북한은 1970년대를 '적화통일의 연대'로 선포하고 '김일성 환갑 잔치는 서울에서 하자'고 북한 주민들을 선동했다. 

    코리아게이트의 파장은 1976년 11월 주미대사관에 근무하던 중앙정보부 소속 김상근 참사관이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더욱 커졌다. 김 참사관은 한국 정부가 미 정치인과 언론인, 학자 등을 포섭하기 위해 '백설작전'(Operation Snow White)을 벌였다고 폭로했기 때문이다.

    이어 박정희 대통령이 박 씨에게 미국 내 로비 활동을 지시한 정황이 미 정보기관의 도청으로 포착됐다는 보도가 1977년 6월 뉴욕타임스를 통해 보도되면서 미국 내 반한 감정이 고조됐다.

    미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미 카터는 코리아게이트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요구했다. 도널드 프레이저 의원이 위원장을 맡은 미 하원 '프레이저 소위원회'도 코리아게이트 조사에 나섰고 특별검사팀까지 구성됐다.

    박정희 정부는 협상 끝에 사면을 조건으로 카터 행정부의 박 씨 송환 요구에 응했다. 박 씨는 1978년 2월 미 의회 공개 청문회에 출석해 "32명의 전·현직 미 의원에게 85만 달러를 선거 자금으로 제공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활동은 한국인으로서의 애국심과 미국에 대한 친선의 감정에서 비롯됐고, 한국 정부와는 무관한 '개인적인 행동'이었다고 선을 그었다.

    이 사건은 워싱턴 연방지방법원이 1978년 8월 박 씨에 대한 기소를 취소하고, 박 씨로부터 돈을 받은 현직 의원 1명이 유죄 판결을 받고 7명이 의회 차원에서 징계를 받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후 박 씨는 2006년 1월 유엔의 대(對)이라크 석유-식량계획인 '이라크 식량을 위한 석유'(oil-for-food) 프로그램 채택을 위해 이라크로부터 250만 달러를 받고 로비를 벌인 혐의로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됐다. 박 씨는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고, 2008년 9월 조기 석방돼 귀국했다.

    박 씨의 빈소는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유족으로는 박 씨의 형과 조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