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조성→ 중재자 등장→ 대화 분위기→ 시간벌기… '쳇바퀴' 같은 노동당식 북핵 매뉴얼
  • ▲ 2018년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이 평양 5.1 경기장에서 열린 공연을 관람한 뒤 양손을 들어 관중들의 박수에 화답하고 있다. ⓒ사진=평양사진공동취재단
    ▲ 2018년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이 평양 5.1 경기장에서 열린 공연을 관람한 뒤 양손을 들어 관중들의 박수에 화답하고 있다. ⓒ사진=평양사진공동취재단
    미국에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우리의 관심은 이제 미국의 대북정책, 그 가운데서도 북핵문제 해결에 쏠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새롭게 출발한 바이든 행정부의 북핵 문제에 대한 공식적 첫 언급은 지난 22일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의 입을 통해 나왔다. 사키 대변인은 북핵 문제에 대해 “새로운 전략(new strategy)을 채택하겠다”고 밝히면서 “한국과 일본, 다른 동맹들과 긴밀한 협의 속에서 현재 상황에 대한 ‘철저한 정책 검토’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선 19일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지명자는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대북 정책을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바이든 대통령 자신도 작년 말 대선토론 과정에서 “북한의 핵 능력 축소를 전제로 김정은과 정상회담을 개최할 수 있다”고 말했다.

    1월 26일자 <조선일보>에는 정통외교 관료 출신이자 북핵 6자회담 우리 측 대표를 지냈던 천영우 전 외교안보수석의 북핵 해법에 관한 기고문이 실렸다.

    기고문에서 천영우 전 수석은 “바이든 행정부가 트럼프의 참담한 북핵 외교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너무 소박한 목표를 설정한 것 같다”며 “그래서 (트럼프처럼) 비핵화라는 불가능한 목표에 매달리다가 가능한 것조차 놓치는 우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 ‘스몰 딜’을 통해 작은 성과라도 차근차근 쌓아나가는 점진적 단계적 접근법을 선택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천 전 수석은 “북의 비핵화는 궁극적 목표로 남겨둔 채 잠정합의를 통해 우선 북의 핵 능력 증강부터 막아놓고, 이미 보유한 핵탄두와 장거리 미사일의 일부를 폐기하는 것을 최선의 현실적 목표로 삼고 있는 것 같다”며 “북한의 핵 능력 제한을 위해 제재 해제카드를 다 써버리면 비핵화는 더 멀어지거나 사실상 물 건너 가게 된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결국 미국의 북핵 문제는 ‘완전한 비핵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 본토 공격 능력을 막는 선에서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다. 이는 결국 아무런 자위적 수단이 없는 우리로서는 김정은의 ‘핵 인질’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핵 문제를 ‘미북 간의 외교문제’로 인식


    더 큰 문제는 문재인 대통령과 이 정부의 북핵 문제에 대한 인식과 태도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국민은 대통령 입을 통해 ‘북핵문제 해결’이나, ‘북한 비핵화’라는 말을 듣지 못하고 있다. 간혹 대통령이 ‘북핵 문제’를 언급하더라도 우리의 생존권이나 안보 측면이 아니라, ‘미국과 북한 사이에 존재하는 문제’라는 ‘강 건너 불구경식’의 인식에서 나오는 발언들뿐이었다.

    실제 행동에서도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을 여러 차례 만났지만, 강력한 비핵화 요구나 핵 개발에 대한 경고를 한 적이 없다. 오히려 해외 순방 때마다 상대국 정상에게 대북 제재 해제를 역설하거나,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다는 주장을 하고 다녀 ‘김정은의 수석 대변인’이라는 외신의 조소를 받았다. 이러는 동안 북한은 핵무기를 기술적으로 완성했을 뿐 아니라, 핵무기 발사체 능력 고도화에 집중했다. 급기야 지난 14일 김정은은 직접 ‘남한을 공격할 전술 핵무기 개발’을 천명하고 나섰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문재인 대통령은 여전히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타령만 하고 있다. 임기 1년을 남겨둔 시점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대한 문 대통령의 노력을 보고 있자면 그야말로 ‘눈물겹다’라는 말 외에는 적절한 표현이 없을 지경이다.

    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미국 바이든 행정부 출범을 계기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며 “북미 대화의 새 돌파구를 마련해서 평화 시계가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우리 정부에 주어진 마지막 1년’이라는 표현에서는 조급함이 묻어난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를 ‘북한 비핵화 국제 사기쇼’에 끌여들었던 정의용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외교부 장관에 임명했다. 김여정에게 찍힌 강경화를 내쳐서 북의 비위를 맞추는 것과 동시에 바이든 행정부도 어떻게 하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라는 무대에 올려보겠다는 두 가지 포석으로 보인다.

    또다시 시작되는 북한의 시간벌기 전략


    눈치 빠른 김정은은 바이든 행정부 출범에 맞춰 야밤 열병식을 개최하고, ‘주적 미국’ 운운하면서 슬슬 긴장 조성 국면에 들어가고 있다. 이쯤 되면 아무리 무딘 사람에게도 이제 좀 익숙한 그림이 보일 것이다.

    김정은이 긴장조성 → (중재자 등장) → 대화와 평화분위기조성 → 시간벌기라는 ‘노동당식 북핵 매뉴얼’을 다시 한번 돌리려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재자’는 북의 입장에서 나중에 물주 노릇을 해야 하는 당사자이기 때문에 끼워 넣는 변수에 불과하다.

    긴장 고조 후 대화와 화해의 손짓. 1993년 북한 핵 문제가 공개적으로 불거진 이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돼온 장면이다. 삼척동자도 알만한 이런 단순하고 뻔한 전술 하나로 북한은 핵 개발 시간벌기와 대북지원, 체제유지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아 왔다.

    북한은 1993년 북핵 위기가 본격화된 이래로 크게 두 번의 비핵화 합의를 파기한 전례가 있다(2018년 싱가포르 미북회담 제외). 1994년 8월 미북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은 핵사찰 허용을 약속했고, 2005년 9월 6자회담에서는 핵무기 포기를 선언했다.

    하지만 북한은 핵연료봉을 숨긴 채 핵 개발을 계속했고, 이후 핵무기확비확산조약(NPT)을 탈퇴한 후 6차례의 핵실험을 했다. 결국 북한의 비핵화 약속은 핵무기 개발을 위한 시간벌기였음이 드러난 것이다.

    임기없는 독재자와 단임제 대통령


    북한이 이처럼 국제사회를 상대로 뻔한 사기극을 반복할 수 있는 것은 임기가 없는 종신 일인 독재체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남한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고, 미국도 길어봐야 8년이다. 특히 5년 단임의 남한 대통령들은 당장 눈앞의 성과에 일희일비하며 대북문제를 다루어왔고, 반면 북한은 시간을 무기로 성과에 집착하는 역대 정부를 철저하게 활용해 왔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몰래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다 천안함 폭침이라는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았다. 박근혜 정부도 초기에는 북한을 합리적인 대화 파트너로 산정하고, ‘통일대박’을 외치며 ‘DMZ세계평화공원 조성’을 제안했다. 심지어 북한을 ‘악의 축’으로 몰아붙이던 미국 부시 정부조차 북한의 자금줄을 조이다가 정권 말기에 성과주의에 급급해 이를 풀어준 전례가 있다.
     
    이처럼 북한은 체제의 운명이 코너로 몰렸을 때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약점’을 역으로 활용, 대화와 평화를 내세우며 위기를 극복해왔다. 남쪽에 좌파 정부가 들어서면 그 효과는 언제나 ‘100%+ α’였다. 긴장을 끝까지 끌어올린 후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를 내세우며 정상회담이라도 제의하면 좌파정권과 보조를 맞춘 언론들은 마치 평화가 온 것처럼 부산을 떨어왔다.

    가장 최근의 평화공세 사례는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수년 동안 긴장을 조성해오던 북한이 2018년 1월 평창올림픽 참가 발표와 함께 갑자기 대화모드로 전환한 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자 국방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남북 군사 회담을 덜컥 제안했지만, 북한은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어차피 너희는 아무 때나 쫓아 나올 상대이니 우리가 필요할 때 부르겠다’는 의미였다.

    북한이 문재인 정부와 대화에 나선 것은 8개월이 지난 평창올림픽을 앞둔 시점이었다. 김정은은 북한에 호의적인 문재인 대통령을 이 평화쇼 무대의 중재자로 적극 활용했고, 결국 트럼프 대통령을 무대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 눈치나 보면서 대북 퍼주기를 시원하게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김여정을 내세워 ‘삶은 소대가리’니, ‘특등 머저리’니 하는 분노를 쏟아냈지만, 어쨌든 미국과 큰 충돌을 피하면서 핵무기와 발사체를 기술적으로 고도화하는 그야말로 황금 같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자유통일의 길이냐 노예의 길이냐


    회담에서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상대를 테이블에 앉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화나 평화쇼를 통해 북핵 문제가 해결될 성질의 것이었다면, 애당초 북핵 문제가 30년 동안 지속되었을 리도 만무하고, 현재 상황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난 30년이 북핵 개발을 막기 위해 지루한 밀당(밀고 당기기)이 이어진 전반전이었다면, 앞으로의 기간은 이미 존재하는 핵무기를 놓고 벌이는 생사를 건 치열한 후반전이 될 것이다. 이 후반전의 결과에 따라 우리가 주도하는 자유통일이 올 것인가 아니면 김정은에 굴종하는 노예의 길이 열릴 것인가가 결정된다.

    문제는 지금처럼 북핵 문제를 우리의 생존 문제가 아니라, 미북 간의 외교 문제로 인식하는 대통령이 있는 한 이 싸움은 해보지도 못하고 이미 승패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지도자는 그 어떤 경우도 공동체의 안보를 도박판에 올려놓는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민족과 국가, 후손들의 운명을 독재자의 선의에 맡기는 도박을 벌이는 것은 그 자체가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다.

    북핵 문제에서 우리가 먼저 단호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안보를 책임져줄 그 어떤 우방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달아야 한다. 지난 역사에서 아무 교훈을 얻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라를 동정해줄 이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