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회 이승만 포럼 학술회의 발표문(2019.6.18.)
  •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 - 박사학위논문』

    정인섭(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 들어가며

     이승만 대통령은 1910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는 1912년 프린스턴 대학출판부에서 같은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광복 이후 제1공화국 시절 국내 정치적으로 압도적 카리스마를 가졌던 인물이다. 일제 패망 직후 국내에서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던 수많은 정치결사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이승만을 대표로 모시려 했다. 자유당 시절에도 그와 1:1로 대적할 수 있는 야당 정치인은 사실상 없었다. 그의 카리스마는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그는 구 한말부터의 정치투쟁과 투옥의 경력, 오랜 해외 독립운동의 신화, 모든 면에서 대미 의존적일 수 밖에 없던 1950년대 한국사회에서 미국을 다룰 수 있던 능력 등과 더불어 미국 명문대 박사라는 학술적 권위까지 갖추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독보적 카리스마를 구축할 수 있었다고 본다.1) 자유당 시절 사람들이 흔히 그를 이박사라고 흔히 불렀다는 사실은 당시 ‘박사’가 ‘대통령’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최고의 존칭이었음을 표시한다. 요즘 같이 영어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다 해도 짧은 영어논문 하나 쓰는 일조차 쉽지 않은데, 구 한말에 교육을 받은 분이 미국 유학을 가서 박사를 받고, 학위 논문이 대학 출판부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왜 국제법상 전시중립을 자신의 박사논문의 주제로 택했을까? 그 점에 대한 본인의 직접적인 설명은 접하지 못했다. 제국주의 세력의 약육강식이 횡횡하던 시절 “만국공법이 대포 1문보다 못하다(萬國公法 不如 大砲一門)”는 냉소적 지적이 유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제법에 어떤 기대를 갖고 있었나? 이 글은 그 이유를 짐작하기 위해 우선 도미 유학 이전 이승만은 국제법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추적해 본다. 이어 그의 유학생활을 개관하고, 논문 내용을 요약 소개한 다음 마무리를 한다. 

     
  • ▲ 24세부터 29세까지 한성감옥에서 종신죄수로 복역할때의 이승만 모습.ⓒ자료사진
    ▲ 24세부터 29세까지 한성감옥에서 종신죄수로 복역할때의 이승만 모습.ⓒ자료사진
    2. 유학 전의 만국공법 인식

     1875년 생으로 1897년 7월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승만은 20대 초반부터 국내 정치적으로 주목받는 청년이었다. 그는 1899년 1월 투옥될 때까지 협성회회보, 매일신문, 제국신문 등의 창간 주역이 되어 이의 주필 또는 사장을 맡으며 상당한 숫자의 논설을 발표했다. 이승만의 10대 후반 시절 이미 국내 언론에는 만국공법의 내용이 자주 소개되고 있었다. 배제학당 재학 중인 1896년 5월 학부(學部)에서 「공법회통(公法會通)」을2) 복각 출간했던 상황이니 만큼 그 역시 만국공법에 관한 논의는 잘 알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이 무렵 만국공법에 대한 이승만의 사고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글은 없다. 당시 이승만이 만국공법 책자를 어느 정도 읽었는지도 알기 어렵다.
     이승만은 1899년 1월 9일 쿠테타 음모에 연루되어 체포·수감되었다. 그는 탈옥을 시도하다 실패하는 과정에서 옥리에 상해를 입힌 죄가 추가되어 7월 18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감옥생활 초기에는 목에 칼을 차고 생활하는 등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으나, 1900년 2월 14일 부임한 김영선 서장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아 독서와 집필을 할 수 있었다. 옥중에서 엄청난 양의 독서와 집필은 이승만의 학문적·사상적 도야의 계기가 되었다. 영어 독해력이 크게 늘었고, 기독교에 입문도 했다. 이 때의 감옥생활은 이승만으로 하여금 서양문물을 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그의 독자적 사유체계를 확립하는 전기가 되었다.3) 일제의 검은 손이 날로 조선을 옥죄어 오던 격변의 그 시기 열혈 청년 이승만이 옥중에 있지 않았다면 그는 차분히 자신을 도야할 여유를 갖기 힘들었을 것이고, 후일 도미 유학과 박사학위 취득도 기대하기 어려웠으리라는 평가도 설득력 있다.4)
     분명한 사실은 수감중 이승만은 만국공법에 관한 여러 서적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승만이 남긴 「옥중잡기(獄中雜記)」에5) 기록된 독서 목록에는 「공법회통(公法會通)」과 「약장합편(約章合編)」6) 등과 같은 국제법 서적이 포함되어 있다. 한편 1903년 1월 한성감옥에는 이승만의 주도로 서적실(도서실)이 마련되었다. 국내 선교사 특히 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책을 구비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약 250권의 책으로 출발했지만, 이승만이 출옥한 1904년 8월에는 523권까지 그 숫자가 늘었다. 이들 장서 속에 「공법편람」과7) 「만국공법요략」8)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9) 이승만의 관심사로 보아 이 역시 읽었음이 틀림없다.  
     한편 감옥에서 이승만은 미국에서 발간되어 선교사들이 넣어준 「Outlook」이란 잡지에 큰 흥미를 보였다.10) 「Outlook」은 비종파적 종교 주간지로 인문·사회적 기사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같이 수감생활을 한 신흥우는 이승만이 종종 이 잡지의 기사를 암송할 정도로 큰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했다.11) 그런데 1900년 1월 20일자 「Outlook」에는 T. Woolsey의 전시 중립권과 금제품에 관한 논문이 수록되어 있었다.12) 이는 후일 이승만의 박사학위논문 주제와 일치한다. 어쩌면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한성감옥에서의 독서로부터 출발했다고도 할 수 있다. 
     만국공법에 관한 책자를 읽었다는 사실과 만국공법을 어떻게 인식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유학 전 만국공법을 포함, 여러 국내외 정세에 대한 이승만의 생각이 가장 잘 정리된 문헌은 그의 「독립정신(獨立精神)」이다. 이 책자에서 이승만은 만국공법을 약소국의 국권수호를 위한 현실적 수단으로 인식하며, 만국공법에 바탕을 둔 세계질서에 대해 어쩌면 비현실적일 정도로 장밋빛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이 공법을 어느 나라가 홀로 세우거나 만국이 합하여 법관을 선출하고 정한 것은 아니로되 교화 높은 나라들이 힘을 굽혀 준행하매 한 두 강포한 나라가 있어 잔약한 나라를 법외로 대접하고 욕심을 부리고자 할지라도 적은 나라가 능히 거절하여 받지 아니하는 권리가 있느니 이것이 공법 힘이요, 설령 적은 나라는 무리함을 당하고도 거절치 못할 경우이며 각국이 시비하여 강한 자로 하여금 무리함을 행치 못하게 하는 것도 또한 공법의 힘이니 공법의 힘이 이렇듯 장한지라.”13)

     “내가 먼저 공법의 뜻을 어기지 말고 공평 정대하게 행세하며 각국들과 친밀히 하여 정의가 돌아올진데 타국의 의리상 친구로 알아 언제든지 내가 남에게 억울함을 당할 때에는 경위로 힘껏 도와줄지니 이는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도와주는 자 많이 생기리라.”14)

     물론 공법을 버리고 불의를 행하는 자도 종종 없지 않지만 공법에

     “어두운 나라들은 자신이 공법을 알지 못하여 남이 업신여겨 그렇게 하는 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하는 말이 만국공법이 대포 한 자루만 같지 못하다며 위력을 써 세상을 대하려 하매, 인하여 나도 또한 공법을 버리고 세력을 믿으려 하는 날에는 남에게도 대단 위태하려니와 자기에게도 극히 염려될 바라.”15)

     고 주장했다.
     즉 “공법의 본의인즉 천리와 인정을 따라 세계 만국과 만국 만민이 일체로 평균한 이익과 권리를 보전케 하고자 함이니 · · · 날로 개명에 나아가 공법의 뜻대로 행하여 피차에 이익을 얻고자 할진데 타국이 무단히 간여할 계제도 없”어지고, 반대로 “깨닫지 못하여 일향으로 개명에 반대하면 마침내 삼분오열하거나 속국과 보호국 되는 화를 면치 못하리라.”고 설명했다.16) 
     이승만은 옥중에서 집필한 “국민의 권리 손해”라는 제국신문 논설에서도 

     “대한 관민이 외교상 관계되는 일을 당하면 항상 말하기를 · · · 강한 나라가 힘을 믿고 경위를 불고하는 고로 어찌 할 수 없으니, 이야말로 만국공법이 대포 한 자루만 못하다 하며, 작은 나라는 공법과 약장을 알아도 쓸데 없다 하는지라. 이로 인하여 당초 공부도 아니 하려하고, 남의 경위와 법률도 듣고자 아니하니 어찌 나라 형세가 점점 쇠하지 않으리오.”17)

     라고 한탄했다. 또한 “국권을 보호할 방책”이란 제국신문 논설에서는 관원들이 공법과 약장을 알아야 이에 따라 백성을 보호할 수 있으니

     “지금 제일 급한 것이 공법회통과 통상약장을 국문으로 번역하여 여러 만질 발간해 각도 각군에 대소를 가려 분배해 내리고 그 관계를 고시해 관원들을 권면해 간절히 공부하게”18)

     하라고 호소했다.
     이러한 주장에 그치지 않고 이승만은 스스로 만국공법 책을 번역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가 수감생활 중 집필한 「독립정신」의 원고는 박용만에 의해 미국으로 반출되었고 1910년 로스엔젤레스에서 처음 출간되었다.19) 당시 이 책자를 미국인에게 홍보할 목적으로 영문 소개문이 만들어져 배포되었다. 한국출판협회 문양목20) 회장 이름으로 작성된 이 문건에는 필자인 이승만이 옥중에서 “만국공법(Mahn Kwok Kong Bup: International Law)”을 번역했다는 설명이 나온다.21) 이러한 이승만의 만국공법 번역설은 그 실물이 남아 있지 않고 이승만 역시 다른 곳에서 자신의 번역사실을 언급한 적이 없어 진위 여부를 속단하기 어렵다. 부분적인 번역에 그치고 완수를 하지 못해 기록과 흔적이 없어졌는지도 모른다.22) 
     만국공법에 대한 이승만의 어찌 보면 비현실적인 정도의 신뢰에 대해 최연식·정지혜는 그가 옥중 개종을 통해 기독교 진화론을 수용함으로써 약육강식의 논리 뿐 아니라, 협력과 상호부조에 의한 진보의 논리가 국제사회에서도 통용되리라고 기대한데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한다.23) 물론 이러한 이승만에 대해 만국공법에 대한 환상에 빠져 그 배후에 숨은 제국주의적 의도를 간과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24) 그것이 환상이든 오해든 이승만은 청·일·러 열강의 틈 속에서 조선은 만국공법을 지키는 가운데 문호개방을 통한 중립외교를 펼치는 방안이 독립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생각했다.25) 이 같은 생각은 도미 유학시기로 연결되었다. 이승만이 하버드와 프린스턴의 대학원 과정에서 일관되게 수강한 과목 역시 국제법, 외교론, 미국 및 유럽의 서양사였다. 그의 박사학위논문 주제는 조선에서부터의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선택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 ▲ 조지 워싱턴 대학교 교복 차림의 유학생 이승만.ⓒ자료사진
    ▲ 조지 워싱턴 대학교 교복 차림의 유학생 이승만.ⓒ자료사진
    3. 미국 유학 생활

    가. 조지 워싱턴 대학 시절

     이승만의 도미 유학의 배경에는 국내에 와 있던 외국 선교사들의 지원과 격려가 있었다. 그들은 이승만이 유학 후 귀국해 유능한 교회 지도자로 성장하기를 기대했다. 이승만은 출국시 미국내 교회 지도자와 저명인사에 대한 선교사들의 추천서를 19통이나 갖고 출발했다.26) 이승만은 유학생 자격으로 여권을 발급받았지만, 트렁크 속에는 민영환이 미국 공사관으로 보내는 서찰을 감추고 있었다. 당시 민영환·한규설 등 개화파 지도자들은 조선의 장래를 우려해 미국 대통령에게 탄원을 하기로 하고, 이승만에게 그 전달임무를 맡겼다. 이들은 조미 통상조약상 알선(good office) 조항에 따라 미국이 한국을 위해 일정한 역할을 해 주기 기대했다. 이런 연유로 이승만은 자신의 “종적이 도처에 남에게 의심을 잘 받는 몸”이라 떠날 때 제대로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다고 술회했다.27) 이승만은 1904년 11월 5일 제물포 항에서 미국 상선 오하이오호에 승선해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그는 도중에 코베에서 배를 갈아타고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에 잠시 머물고 12월 31일 목적지인 워싱턴 D.C.에 도착했다. 미국에 대한 조선독립 지원 호소 임무는 본 원고의 주제가 아니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이승만은 서울에서 받은 선교사 게일의 소개장을 들고 루이스 햄린(Lewis Hamlin)을 만났다. 그는 서재필이 미국에서 결혼할 때 주례를 선 사람이었다. 햄린은 이승만이 장차 유능한 선교사가 되리라 기대하고 마침 한국 공사관 법률고문이자 조지 워싱턴 대학 총장인 찰스 니드햄(Charles Needham)과 윌버(Wilber) 학장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이들과 면담 후 이승만은 곧 시작하는 1905년 봄학기부터 2학년으로 편입이 허용됐다. 이승만이 대학교육을 받은 적은 없으나 배재학당에서의 교육을 대학과정의 일부로 인정받은 듯 했다. 배재학당은 영문 명칭에서 College를 사용했었다.28)
     그가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수강한 과목들은 논리학, 영어, 미국사, 프랑스어, 철학, 천문학, 경제학, 사회학, 유럽사, 셈어 등이었다. 유럽사 한 과목만 A 학점을 받았고, 나머지 과목은 모두 B 또는 C 학점이었다. 프랑스어와 수학은 D 학점을 받았다.29)
     조지 워싱턴 대학은 매학기 도서관 이용료 1달러를 제외한 나머지 학비는 전액 면제시켜 주었으나, 생활비는 스스로 조달해야 했다. 이승만은 조선에 대한 소개와 신앙간증 등으로 생활비를 벌었다. 주로 워싱턴 부근에서 YMCA가 주관하는 강연을 해 대개 2-5 달러 정도의 사례로 받았는데, 많은 때는 30달러를 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점차 동부의 원거리 도시로부터 초청받기도 했다. 강연에서는 대개 조선에서의 선교사 활동과 조선인의 생활상을 100여장의 사진과 함께 소개했고, 후반부에서는 조선 독립의 유지야 말로 일본의 팽창야욕을 저지하는 보루로서 미국의 국익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 점에 대해서는 불편한 심기를 표하는 미국인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30) 당시 일본이 거대한 중국에 위협이 되고 결국에는 미국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는 그의 주장을 누구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31) 이승만의 조지 와싱톤대 수학중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후원자의 하나인 민영환은 11월 30일 자결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1907년 6월 5일 32세의 이승만은 2년 4개월만에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마지막 학기 긴장된 생활과 영양 부족으로 건강이 상했고, 아파서 몇 과목 수업에 자주 결석을 했기 때문에 졸업을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이기도 했으나,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워싱턴 포스트 주말지방판은 “졸업장이 수여될 때 조선의 젊은이 이승만보다 더 뜨거운 박수를 받은 사람은 없었다”고 보도했다.32)

     
  • ▲ 하바드 대학원 학생들과 이승만(윗줄 왼쪽) 앞줄 가운데 국제법교수 윌슨.ⓒ자료사진
    ▲ 하바드 대학원 학생들과 이승만(윗줄 왼쪽) 앞줄 가운데 국제법교수 윌슨.ⓒ자료사진
    나. 하버드 대학 시절

     조지 워싱턴 대학을 졸업하자 그의 유학을 주선해 준 감리교단 측은 귀국을 종용했으나, 부친인 경선공은 국내 사정상 당분간 귀국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만류했다. 이승만은 이미 1906년 12월부터 1907년 1월 사이 하버드 대학에 연락해 박사과정을 2년에 마칠 수 있는지를 문의했다. 하버드 대학 측은 2년으로는 부족하다며 일단 석사과정 입학만을 허가했다. 그는 1907년 9월부터 하버드대학 역사·정치·경제학과에서 수학했다. 당시 이승만은 미국사, 유트레히트 조약에서 현대까지의 유럽사, 서구 열강의 팽창주의와 식민정책, 특별세미나 19세기 유럽의 상공업관련 경제학, 국제법과 중재, 미국의 외교정책 등의 과목을 수강했다. 학점은 대부분, B 또는 C 학점을 받았다.33) 
     하버드에서의 1년은 그다지 즐겁지 못했던 듯하다. 학교 동료에 대해 별달리 깊은 인상을 주거나 받지도 못했다. 석사 학위도 바로 받지 못했다. 경제학 과목에서 D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프린스턴 시절인 1909년 여름학기에 다시 하버드로 가서 미국사를 수강하고 B 학점을 받음으로써 졸업 요건을 채웠다. 형식적인 석사 졸업식은 1910년 2월 23일 있었다.34) 
     하버드 재학 시절인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과 장인환에 의한 스티븐슨 암살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언론에는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비우호적 기사가 자주 보도되었고, 그를 대하는 주변의 태도도 냉냉했다. 그는 하버드 대학에 별다른 애착을 느끼지 못했다. 다시 귀국 여부를 고민했으나, 국내 사정 역시 여의치 못했다. 이승만은 미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 ▲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국제법 박사 학위를 받은 이승만.ⓒ자료사진
    ▲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국제법 박사 학위를 받은 이승만.ⓒ자료사진
    다. 프린스턴 대학 시절

     하버드를 떠난 이승만은 1908년 여름 일단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 기숙하며 신학 수업을 듣는 한편, 기회가 되면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할 생각으로 몇몇 강의를 청강했다. 우연히 뉴욕 시내에서 조선에서부터 알던 장로교 선교부의 어니스트 홀(Ernest Hall) 목사를 만나 사정을 말하니, 그는 이승만에게 자신의 모교인 프린스턴 대학으로 가라고 권했다. 홀 목사의 안내로 프린스턴 신학교의 찰스 어드먼(Charles Erdman) 박사와 프린스턴 대학원 앤드류 웨스트(Andrew West) 원장과 면접한 후 바로 입학 허가를 받았다. 이승만은 신학교 기숙사인 캘빈클럽에 무료로 기숙하며 신학 강좌를 듣는 한편, 대학원 역사·정치·경제학과의 박사과정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생활을 가장 즐거운 학창시절로 기억했다. 어드먼 박사가 베풀어준 호의는 평생 잊을 수 없으며, 웨스트 대학원장도 그가 박사과정을 마칠 수 있도록 모든 도움을 주었다고 회고했다. 무엇보다도 윌슨(W. Wilson) 총장과 그의 가족과도 친밀한 친구가 되었다.35) 
     프린스턴에서 1908년 첫 학기에는 국제법과 외교(Elliott 교수), 연방당 붕괴까지의 미국헌법사(McElroy 교수), 철학사(Ormond 교수) 등을 수강했다. 1909년 봄 학기에는 철학사(Ormond 교수), 연방당 붕괴 이후의 미국헌법사(McElroy 교수), 국제법과 외교(Elliott 교수)를 수강했다. 1909년 가을 학기에는 1789-1850년 미국사(McElroy 교수), 국제법(Elliott 교수)을 수강했다. 박사 자격시험도 치루었다. 신학 수업은 계절학기에만 수강했다. 1910년 봄학기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내며 박사학위논문에 몰두했다.36) 논문 제목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으로 국제법상 전시중립제도의 발달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승만은 필기와 구두 자격시험이 혹독하게 어려웠고 참담한 기억을 갖고 있다고 회고했다.37)
     드디어 1910년 6월 14일 졸업식날 이승만은 박사학위(Ph.D.)를 수여받았다. 이는 윌슨 총장이 정계로 투신하기 전 마지막 프린스턴 대학 졸업식이었다. 이승만은 졸업식이 자신의 준비단계를 마무리 짓는 날이었는데 기쁨보다 슬픈 감정이 앞섰다고 회고했다.38) 그는 조선으로 돌아가 일을 해야 했는데, 조선의 상황은 그럴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자신의 미래가 불안했다.
     이승만의 논문은 웨스트 학장의 주선으로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39) 그는 이후 몇 년간 인세를 받았는데, 그 중 1.8 달러와 2.25 달러 수표는 후일까지 기념으로 간직했다.40) 미국에서는 권위 있는 대학 출판부에서 간행된 서적을 학술적으로 가장 높이 쳐 준다. 이승만의 졸업논문은 조선인 최초로 미국 대학 출판부에서 간행된 책자였다.

      
     
  • ▲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한 이승만 박사학위 논문 표지.ⓒ자료사진
    ▲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한 이승만 박사학위 논문 표지.ⓒ자료사진
    4. 논문의 내용

     이승만의 박사논문은 해상무역에 대한 규제를 중심으로 19세기 중엽까지 전시 중립법의 발전을 시대적 변천에 따라 설명하고 있다. 국제법상 “중립”이란 무력분쟁시 교전 당사국이 아닌 일반 국가들의 법적 지위를 가리킨다. 전쟁이 발발하면 국가간에는 평시와 다른 법적 관계가 성립된다. 즉 교전국 사이에는 무력분쟁에 관한 법이 적용되며, 교전국과 중립국 사이에는 중립법규가 적용된다. 중립은 기본적으로 교전국의 권리를 중심으로 하는 제도로서, 전시(戰時) 중립국에게는 평상시에는 없던 새로운 의무가 발생하게 된다. 중립국은 교전국들을 공평과 불관여로 대해야 하며, 평시에는 인정되지 않는 교전국의 일정한 행위를 용인할 의무를 지게 된다. 중립법의 적용에는 중립국의 특별한 수락선언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무력분쟁이 발발하면 교전국이 아닌 국가들에게 자동적으로 적용되게 된다. 한편 국제법상의 중립은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을 전제로 적용되는 제도이며, 평상시 각국의 외교정책상의 중립과는 별개의 내용이다. 
     이 책은 중립법의 발전사를 5개의 시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즉 제1장에서는 근대 국제법 발전 초기부터 1776년 미국 독립선언 시까지, 제2장에서는 1776년부터 1793년까지, 제3장에서는 1793년부터 1818년까지, 제4장에서는 18181년부터 1861년까지, 제5장에서는 1861년부터 1872년까지 중립법의 발전과정을 설명하고, 마지막 제6장은 전체 내용을 요약 정리하고 필자의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 각 장별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1장(1776년까지): 미국의 독립전쟁 이전까지 전시중립에 관한 국제법은 일관성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근대 국제법 발전 초기에는 중립법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아 중립국으로서는 자신이 전쟁에 휩쓸리기를 두려워하지만 않는다면 교전국 중 어느 일방 또는 쌍방을 사실상 자유롭게 지원할 수 있었다. 중립국 영역의 불가침도 존중되지 않았다. 그리고 일단 전쟁이 발발하면 교전국은 적국의 상업거래를 가능한 한 완전히 차단하려 해 중립국의 교역은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중립법이 제대로 발전하지 않은 상태라 중립국 교역은 사실상 교전국의 처분에 맡겨진 상황이었다. 
     해상무역이 성장함에 따라 상업교류를 보호하기 위해 중립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대체로 선발 강국이었던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이 중립교역을 상대적으로 엄격히 규제하려는 입장이었던 반면, 후발국인 네덜란드, 프러시아 등은 중립교역의 자유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어느 나라도 중립교역에 대해 일관적 실행을 수행하지는 않았으며, 시기에 따라 또는 상대방에 따라 다른 기준을 적용했다. 결론적으로 18세기 후반까지 국제법상 중립법규의 내용은 모호하고 불완전했다. 
     제2장(1776-1793년): 이 기간은 중립국의 권리·의무가 명확해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미국의 독립은 중립법 발전사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기록했다. 영국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한 미국은 유럽국가들로부터의 간섭에서 벋어나는 일이 자국 발전에 긴요하다고 판단했다. 일단 전쟁이 발발하면 유럽국가들은 교전권을 과도하게 행사하며 중립교역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유럽국가들 간의 분쟁에 되도록 개입하지 않고 중립국의 자유를 최대한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미국이 처음부터 원했던 목표는 ① 중립선박 내 화물은 소유자의 국적과 관계없이 몰수대상에서 제외 ② 적선(敵船)에 탑재된 중립화물도 몰수대상에서 제외 ③ 전시금제품(戰時禁制品) 대상의 축소 ④ 중립국 영토관할권의 존중 등이었다. 미국이 이러한 태도를 취한 이유는 유럽대륙에서 전쟁이 발발해도 자신은 이에 휘말리지 않고 중립국으로 남으며, 교전국 양측 모두와 교역을 계속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기 원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러한 내용을 담은 양자조약 체결을 통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 했다. 중립선박 내 화물의 몰수배제는 상대적으로 쉽게 수용되었으나, 프랑스 등 유럽의 강국들은 적선상의 화물은 적화(敵貨)라는 원칙을 잘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특히 영국은 중립선박 내 적화를 몰수하는 실행을 오랫동안 고수했다. “중립선박 내 화물 몰수 배제”에 관한 미국의 입장은 1780년 제1차 무장중립동맹에 의해 지지되었으나, 곧 이어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유럽대륙이 전란에 휩싸이자 중립교역에 대한 가혹한 교전권 행사가 다시 계속되었다. 
     한편 미국은 독립 초기부터 당시까지 관행적으로 인정되던 중립국내 교전국의 포획재판소(捕獲裁判所) 운영과 중립국에서의 교전국의 모병(募兵)과 전력증강을 금지했다. 사략선(私掠船) 제도의 폐지도 주장했다. 오늘 날의 관점에서는 이해되기 어렵겠지만 당시는 교전국이 적선을 나포하면 제3국인 중립국 내에 자신의 포획재판소를 설치해 몰수재판을 진행했다. 교전국은 중립국인 제3국에서 자신의 병력을 모집하기도 했고, 교전국 민간상선은 적국 상선을 나포할 권리가 인정되었다. 미국은 이러한 제도의 금지를 주장한 것으로, 이는 중립법 발전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제안이었다. 미국은 전시에 교전국이 해상에서 포획·몰수할 권리가 인정되는 전시금제품(戰時禁制品) 목록의 축소도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결국 18세기 후반 중립법 발전은 미국과 유럽국가간 투쟁의 역사였으며, 처음에는 공상 같던 미국의 주장도 차츰 국제사회에서 수용되게 된다. 
     제3장(1793-1818년):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영미 전쟁 등이 발발했던 18세기 말, 19세기 초엽의 시기는 중립국의 입장에서는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기간중 영국은 프랑스와 그의 식민지로 향하는 모든 교역을 봉쇄하려 했다. 프랑스의 동맹국에 대해서도 같은 조치가 취해졌다. 프랑스 역시 대륙봉쇄로 상징되듯 영국과 관련된 모든 교역을 봉쇄하려 했다. 서로 상대방의 선박이나 상대방 화물을 선적한 선박은 물론 상대방의 항구로 향하는 모든 선박을 나포했다. 이 시기 중립교역의 자유는 철저히 무시되었고, 유럽국가들간의 전쟁에서 중립을 유지하려던 미국의 이익이 크게 침해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대결 속에서 약 1500척의 미국 선박이 각종 구실로 양국에 의해 나포되었고, 6천명의 미국인이 영국에 의해 징용되었다. 그 결과 1812년 영·미 전쟁이 발발했다. 
     이 시기에 미국은 양자조약의 체결을 통해 중립선박 내 화물의 몰수배제를 인정받으려 지속적으로 노력했으나 현실에서는 잘 존중되지 않았다. 적선(敵船) 상의 화물은 적화(敵貨)라는 원칙의 폐기는 더욱 어려웠다. 미국의 전시금제품 목록의 축소 주장은 영국의 반대에 부딪쳤다. 이 시기 미국의 중립노력은 1794년과 1818년 중립법 제정을 통해 나타났다. 미국은 자국민이 교전국 어느 일방을 위해 복무하거나 무장 강화에 기여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당시로서는 혁신적 입법이었으나, 후일 영국을 포함한 유럽국가들도 이러한 원칙을 국내법으로 수용했다. 본국 호위 하의 중립선박에게는 나포 면제를 인정하자는 미국의 주장을 영국도 결국에는 수용하게 된다. 
     제4장(1818-1861년): 중립법에 있어서 새로운 발전이 있었던 시기였다. 영국도 1819년 미국의 예를 따른 외국모병법을 제정해 영국인이 외국을 위해 군대에 복무하거나 영국 선박을 무장시키는 행위를 금지했다. 미국은 먼로 선언(1823)을 통해 외교상의 중립주의를 명확히 했다. 
     특히 크리미아 전쟁을 종결짓는 1856년 「파리 선언」은 중립법 발전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오랫동안 미국이 주장해 왔던 사략선 폐지, 중립선박 화물의 포획 금지, 적선상 중립국 화물 포획 금지 등이 이 선언 내용에 포함되었다. 협상과정에서 미국은 육상 전투에서는 적국인의 사유재산이 몰수되지 않는데 왜 해상에서만 적국 사유재산이 포획되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며, 전시금제품을 제외하고는 공해상 교전국민의 사유재산은 몰수대상에서 일체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영국이 이에 완강히 반대함으로써 「파리 선언」에 이 점까지는 수용되지 않았다. 이는 미국이 「파리 선언」에 가입하지 않은 주요 이유가 되었다. 
     이 시기중 스페인령 미주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이들의 교전상태 또는 신생국 독립 승인이 주요 외교현안으로 제기되었다. 미국은 가급적 중립을 지키며 독립이 실제 이루어졌느냐를 기준으로 승인을 부여하였다. 텍사스와 헝가리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했다. 
     미국은 시종 전시금제품 목록의 축소와 해상봉쇄는 통고와 실효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검문·검색권 적용 축소에도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제5장(1861-1872년): 중립국의 자유를 최대한 확보하려고 노력하던 미국조차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입장을 크게 변화시켰다. 당시 영국·프랑스 등은 남부연합을 교전단체로 승인하고, 중립을 선언했다. 미국은 이에 반발하며 남부연합을 반란군이라고 전제하고, 전 남부해안은 봉쇄되었고 남부 출입을 시도하는 모든 선박은 나포된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영국식 연속항해주의(連續航海主義)를 더욱 확장 적용해, 중립국 항구에서 중립국 항구로 항해 도중인 선박들도 최종적으로 남부 항구로 향할 의도가 있거나 전시금제품을 수송하고 있으면 이를 나포했다. 특별히 전쟁용이 아니라도 식품을 포함해 사용가능한 거의 모든 물건을 전시금제품으로 분류했다. 교전국의 권리를 극대화시킨 이러한 미국의 입장은 과거 자신이 유럽국가들에 대해 중립국으로서의 권리를 옹호하던 입장과는 완전히 상반된 태도였다. 과거 미국이 비난하던 유럽 국가들보다 더욱 가혹하게 교전권을 행사했고, 미국의 실행은 국제적 비난 대상이 되었다. 이제는 영국을 포함한 유럽국가들이 미국에 대해 중립국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게 되었다. 
     이 시기 중립과 관련해 발생한 알라바마호 문제는 후일까지 널리 알려진 유명한 사건이었다. 미국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영국 조선소가 건조해 남부연합에 인도한 각종 전함은 남북전쟁 기간중 미국의 교역에 커다란 타격을 가했다. 알라바마호는 미국 선박에 가장 큰 피해를 입힌 대표적 전함이었다. 미국은 영국의 중립법 위반을 주장했고, 마침내 이 문제는 국제중재재판에 회부되었다. 5개국 출신으로 구성된 재판부는 영국의 중립법 위반과 손해배상 의무를 선언했다. 이 판정은 영국으로서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주로 교전국의 입장에 섰던 영국은 처음으로 중립국의 권리에 본격적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자국민에게 중립의무 실행을 교육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이 역시 결과적으로 중립법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다. 
     마지막 제6장은 전체 내용의 요약이었다. 


  • ▲ 프린스턴 대학교 기숙사(Hodge Hall) 자기장에서 논문을 쓰는 이승만.ⓒ자료사진
    ▲ 프린스턴 대학교 기숙사(Hodge Hall) 자기장에서 논문을 쓰는 이승만.ⓒ자료사진
     5. 평가

     과거 주권국가는 필요하다면 전쟁을 할 권리를 인정받았고, 교전권의 행사는 별다른 제한을 받지 않았다. 유럽대륙에서 큰 전쟁이 발발하면 주요국들은 대부분 동맹이나 적대관계에 처하게 되었다. 진정한 중립국이 존재하기 어려웠고, 중립국의 지위는 존중받기 어려웠다. 자연 18세기 후반이 될 때까지 중립법의 발달도 미진했다. 1776년 미국의 독립은 유럽 밖에 신흥 강국이 최초로 등장했음을 의미했다. 미국은 건국 초부터 유럽문제는 되도록 관여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견지했다. 이제 국제사회에 진정한 의미의 중립국이 상시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 책은 제목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중립법의 발달을 철저히 미국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우선 미국의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각장의 시대구분을 나누고 있다. 즉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 1793년 워싱턴 대통령의 중립선언 발표(1794년 중립법 성립), 1818년 미국 중립법 성립, 1861년 남북전쟁 발발 등이 각장 구분의 기준이 되고 있다. 또한 당시 유럽국가와 대서양을 사이에 둔 미국으로서는 해상에서의 중립교역의 확보가 관심 대상이었으며, 육전(陸戰)에서의 중립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 책 내용 역시 해상에서의 중립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유럽에서 분쟁이 발생해도 미국은 중립국으로 남으며 교전 당사국 쌍방과 교역을 계속하기 원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우선 중립국 선박 내 화물의 몰수배제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적선상이라도 중립국 화물은 보호되기 원했다. 이는 중립국인 자국의 선박과 화물의 보호를 위해서였다. 또한 미국이 항상 피해국의 입장에 설 수 밖에 없었던 사략선 제도의 폐지에 진력했다. 이 책은 미국 건국 후 약 1세기 동안 미국이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 기울인 노력과 이 같은 주장이 국제사회에 수용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들은 마침내 1856년 「파리 선언」이란 다자조약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상당 부분 수용될 수 있었다. 「파리 선언」은 중립법에 관한 최초의 다자조약이었다. 
     그러나 미국도 남북전쟁으로 인해 전쟁의 당사국이 되자 태도를 급변시켰다. 남부연합과 교역하는 유럽 중립국들의 교역을 단속할 필요가 생기자 중립교역에 대해 과거와는 반대로 엄격한 정책을 강행했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도 국제사회에서 교전권의 행사에 대해서는 통제가 지속적으로 강화되었고, 중립국 지위는 개선되었다. 이승만은 그의 논문 맨 마지막 문단을 다음과 같이 서술함으로써 마무리 지웠다. 

     “중립법에 관한 미국의 영향은 깊고 폭넓게 미치었다. 현재의 전반적인 중립제도를 1776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초기와 비교하면 국제법의 다른 어떠한 분야보다도 많은 발전이 있었다. 이 발전이 모든 인류에게 대단한 축복이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적대적 작전 영역은 크게 제한되었고, 전시중 국가간의 평화적인 교류수단은 괄목할 정도로 보장되었다. 무엇보다도 중립교역의 자유가 확대되고 보장되었다. 유럽의 해양강국들이 제기했던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지속적으로 자유주의적 입장을 천명함으로써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위와 같은 달성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승만의 책자 이전에는 미국에서도 전시중립을 주제로 한 단행본이 자주 발간되지 않았다. 미국에서 전시중립에 관한 단행본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간행되었다.41) 그런 의미에서 이 책자는 전시중립의 발전을 미국적 관점에서 정리한 선도적 학술서 중 하나였다. 제1차 대전이 발발하자 자신이 중립무역에 관한 권위자로 인정받았다는 이승만의 술회는 과장이 아니었을 것이다.42)
     다만 이 논문에서는 일정한 한계도 발견된다. 첫째, 이승만이 논문의 대상시기를 1872년까지로 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연구대상을 작성 시보다 근 40년 전인 1872년까지로 한정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논문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의 논문이 완성되기 이전 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해전에 있어서 중립국의 권리의무에 관한 협약」(헤이그 제XIII협약)이 채택되었고,43) 1909년에는 1856년의 「파리 선언」을 개정하는 「해전법규에 관한 런던선언」이 채택되었다.44) 이 두 회의는 20세기 초 중립법 발전사에서 한 획을 긋는 회의로서 지구상 대부분의 주요국들이 참여했다. 미국도 이들 회의에 참석하고 서명했다. 이승만이 자신의 논문주제와 관련해 이 회의 결과의 중요성을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1910년 논문 작성시 해상 중립법 발전의 국제적 하이라이트는 이 두 개의 문서, 특히 1907년 헤이그 협약이었다. 따라서 논문이 이에 관한 설명을 담고 있지 않다면 중립법 발전에 관한한 아직 완성되지 않은 논의에 불과하다고 평할 수 있다. 이 분야에 관해 가장 중요한 최신 동향을 포함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 이 논문은 해상 중립법 발전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정리·소개하고 있을 뿐, 그 과정에 대한 깊이 있는 법적 분석이나 필자 나름의 학술적 주장은 별로 담고 있지 못하다. 111쪽에 불과한 본문의 분량이나, 활용되고 있는 참고문헌으로 볼 때도 전시 중립법에 대한 당시 학계의 논의를 풍성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이 논문이 학계의 주목받은 저작물은 아니었다. 자연 후일 학계에 미친 영향도 눈에 두드러지지 않는다. 우선 이 책에 대한 제대로 된 서평(book review)가 나온바 없다. 이후 발간된 중립법에 관한 학술서나 학술논문에서 이 논문이 인용된 사례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간혹 발견되는 피인용 사례도 논문 필자의 견해를 인용하기 위한 경우가 아니라, 논문 속에 지적된 역사적 사실의 재인용을 위한 출처로 활용된 경우에 불과했다. 
     하나 더 아쉬운 점은 조선에 관한 설명이나 사례지적이 빠졌다는 사실이다. 구 한말 조선은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을 겪었다. 조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 땅에서 전쟁이 벌어졌고, 국외중립 선언은 무시되었다. 이 두 개의 전쟁은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되는 과정이었다. 중립법의 입장에서 분석할 대상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은 이 전쟁을 직접 목격했었고, 박사논문 작성시 이미 관련 국제법서들도 출간된 바 있어 중립법의 관점에서 긍정적이든 비판적이든 이를 취급하기 그리 어렵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45) 사실 이승만의 학위논문 주제가 전시 중립법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이 글 속에 조선 말의 상황이 언급되어 있는가에 관심을 표한다. 그러나 미국의 관점에서 본 해상 교역의 자유를 중심으로 한 이 논문은 미국이 직접 관련되지 않은 사건인 조선에서의 전쟁문제는 전혀 다루지 않았다. 한국인으로서는 아쉬운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박사논문은 그 내용의 현재적 가치나 의의와 관계없이 이 땅의 법학 또는 정치학 전공자들에게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 문헌이다. 이는 조선인이 서양의 대학에서 정식 과정을 거쳐 취득한 첫 번째 박사학위논문이며, 미국 대학 출판부에서 조선인을 필자로 발간된 첫 번째 학술서이다. 우리 법학계가 이만한 수준의 논문을 다시 쓸 수 있기까지에는 한 세대 이상의 세월이 필요했다. 사실 19세기까지 전시 중립법 발전에 관한 한 100년이 넘은 이승만 대통령의 연구 이상 자세한 글이 아직 국내에서는 발표된 바 없다. 


    각주:
    1) 이한우,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 (상), (조선일보사, 1995), pp.98-99.
    2) 블룬츨리(J. Bluntschli, 1808-1881)의 “Das moderne Völkerrecht der civilisierten Staaten als Rechtsuch dagestellt(1867)”를 윌리엄 마틴이 1880년 청에서 한역·출간한 국제법서. 
    3)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 2005), p.74.
    4) 정병준(상게주), pp.75-77.
    5) 「옥중잡기」는 이승만이 한성감옥 수감시절 집필·기록한 약 40종의 각종 글 모음집으로 서양식 노트북에 육필로 기록되어 있다. 단 그가 수감생활 중 읽은 도서목록 전체가 여기에 수록되어 있다고는 볼 수 없다. 
    6) 조선이 1876년 이후 각국과 맺은 조약 등을 모아 1898년 외부(外部)가 간행한 책. 2책으로 구성.
    7) 윌리엄 마틴이 Woolsey의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International Law(1866)을 청에서 1877년 번역·출간한 국제법서.
    8) 영국의 T. Lawrence의 A Handbook of International Law(1885)를 Y. Allen이 1903년 청에서 한문으로 초역한 국제법서. 1906년 국내에서 복각 간행되었다. 
    9) 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연세대학교 출판부, 2002), p.92.
    10) New York Outlook과 이의 편집인 L. Abbott의 이승만에 대한 영향에 관해서는 최연식·정지혜, 독립정신에 나타난 이승만의 만국공법 인식과 독립국가 구상,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34권 제2호(2013), pp.17-22 참조.
    11) 이정식,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청년시절(동아일보사, 2002), p.109.
    12) 이정식(상게주), p.112.
    13) 이승만, 독립정신(정동출판사, 1993), p.50.
    14) 이승만, 독립정신, p.260.
    15) 이승만, 독립정신, p.50.
    16) 이승만, 독립정신, pp.50-51.
    17) 제국신문 1903.1.15. 자. 
    18) 제국신문 1903.1.19. 자.
    19) 「독립정신」의 초판 출간시기에 관한 논란은 김학준, 구 한말의 서양정치학 수용연구(개정증보판)(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2), p.503 참조. 
    20) 문양목(1869-1940): 을사조약 이후 도미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1908년 대동신서관이란 출판사를 설립해 민족의식 고취에 필요한 책을 출간했다. 
    21) 유영익은 이 소개문의 영문 필치나 내용으로 보아 이승만 스스로 작성해 배포한 것이 틀림없다고 단언한다. 유영익(전게주 9), p.214. 이 소개문은 같은 책 pp.211-214에 수록되어 있다. 한편 여기서의 만국공법이 월리엄 마틴이 북경에서 1864년 번역·출간한 「만국공법」 책자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국제법 일반을 칭하는 말인지는 불분명하다. 
    22) 이승만의 「옥중잡기」에는 1902년 6월 18일까지 역저 목록이 들어 있는데, 이에도 만국공법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번역서 목록은 유영익(전게주 9), p.263에 수록. 
    23) 최연식·정지혜(전게주 10), p.6.
    24) 정병준(전게주 3), p.78.
    25) 정병준(전게주 3), pp.124-125.
    26) 오인환, 이승만의 삶과 국가(나남, 2013), p.51.
    27) 이승만, 미국으로 가는 리승만씨 편지, 제국신문 1904.11.26. 원영희·최정태 편, 언론인 이승만의 글모음(1898-1944)(조선일보사, 1995), p.166 수록.
    28) 아펜젤러는 1897년 6월 8일 이승만의 배제학당 졸업식을 조선에서 최초의 대학 졸업식이라고 표현했었다. 이정식(전게주 11), p.52.
    29) 올리버(서정락 역),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단석연구원, 2010), p.107.
    30) 올리버(상게주), p.109-110.
    31) 올리버(전게주 29), p.112.
    32) 올리버(전게주 29), p.110.
    33) 올리버(전게주 29) p.114; 이한우(전게주 1), p.87.
    34) 김학준(전게주 19),  p.524.
    35) 청년 이승만 자서전, 이정식(전게주11), pp.310-311에서.
    36) 이한우(전게주 1), p.97; 올리버(전게주 29), p.120; 김학준(전게주 19), p.528.
    37) 올리버(전게주 29), p.123.
    38) 청년 이승만 자서전(이정식, 전게주 11 책에 수록), p.312.
    39) 출간된 단행본 속지에는 “Approved by the Department of History, Politics, and Economics, June 1911”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는 학위논문의 승인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행본으로의 출판이 동의된 날짜라고 한다. 김학준(전게주 19), p.530.
    40) 올리버(전게주 29), p.122.
    41) 1910년대 미국에서 전시중립에 관해 출간된 단행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Fenwick, The Neutrality Laws of the United States(1913); Coudert, Neutrality - Permanent Difficulties and Present Perils(1915); Shepherd, The Protection of Neutral Rights at Sea; Documents on the Naval Warfare(1915); Brewer, Rights and Duties of Neutrals; a Discussion of Principles and Practices, 1916; U.S., The Laws of Neutrality as Existing on August 1, 1914. May, 1918(1918); Hyde, Neutral Persons and Property within Belligerent Territory(1919). 
    42) 청년 이승만 자서전(전게주 35), p.311.
    43) Hague Convention XIII: Rights and Duties of Neutral Powers in Naval War. 또한 같은 회의에서 채택된 Hague Convention X: Adaptation of the Convention of Geneva to Maritime War도 해전에서의 중립과 관련된다. Hague Convention V: Rights and Duties of Neutral Powers and Persons in War on Land는 육전(陸戰)에서의 중립을 다루고 있다. 
    44) Declaration concerning the Laws of Naval War. 단 런던 회의의 주최국인 영국이 이 선언의 비준을 거부하자 다른 서명국들도 모두 이를 비준하지 않아 발효에는 이르지 못했다. 
    45) 청·일전쟁에 관해서는 有賀長雄, 日淸戰役國際法論(1903)과 이의 불어판 La guerre sino-japonaise au point de vue de droit international(1896)이 있다. 러·일전쟁에 관해서는 같은 저자의 La Guerre russo-japonaise : au point de vue contienental et le droit international d'après les documents officiels du grand état-major japonais, section historique de la guerre de 1904-1905(1908)이 있다. 또한 Lawrence, War and Neutrality in the Far East(1904); Birkenhead, International Law as interpreted during the Russo-Japanese War(1905) 등도 러·일전쟁시 조선의 중립문제를 다루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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