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회 이승만포럼- 김명섭 교수 발표 전문
  • 이승만 저서 『독립졍신』의 역사적 의미

    김명섭(연세대 교수. 이승만연구원 원장)

    I. 서

    러일전쟁이 발발했던 1904년 2월 한성감옥서(漢城監獄署)에서 집필을 시작
    하여 1910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순한글로 초판된 『독립졍신』1)은 저자인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 1875-1965)에 대한 정치적 논쟁에 가려 제대로 조
    명되지 못했다. 이 책 출간 이후 저자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과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어서 남긴 정치적 공과(功過)에 대한 평가와 분리해서 20세기 초에
    쓰여진 이 책을 당대의 맥락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우남 이승만 전집』 제1권 『독립정신』 역주본과 제2권 『독립졍신』
    원문 영인본에 대한 해제이다. 제1권 역주본에는 원본에 수록된 다량의 사진,
    지도, 그리고 도화 자료들이 재수록되지 않았으므로 전문적 독해를 위해서는
    제2권 영인본과 함께 읽을 필요가 있다.


  • ▲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터지자 한성감옥에서 이승만이 몰래 저술한 옥중저서 [독립정신]. 사진은 가장 최근에 발간된 비봉출판사 [독립정신] 표지.
    ▲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터지자 한성감옥에서 이승만이 몰래 저술한 옥중저서 [독립정신]. 사진은 가장 최근에 발간된 비봉출판사 [독립정신] 표지.
    II. 『독립졍신』 집필의 역사

    이 책의 저자인 이승만은 24세이던 1899년 1월 9일 전제군주정의 개혁을
    통해 독립을 보전하려는 정치활동을 벌이던 중 일본에 있던 박영효의 정계복
    귀를 도모하다가 투옥되었다. 수감 직후 옥중동지 최정식(崔廷植, 만민공동회
    총대의원), 서상대(徐相大) 등과 함께 주시경(周時經, 본명 周相鎬,
    1876-1914)을 통해 전해진 권총을 들고 탈옥을 시도했다가 1899년 7월 11일
    평리원 재판에서 곤장 1백대와 무기징역에 처해졌다(Rhee, n.d.
    “Autobiographical Notes,” 156, 167-68).
    이승만은 옥중에서 개신교 신자가 되었는데, 개신교는 이 책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은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할 당시만해도
    영어와 신학문을 배울 목적을 가졌을 뿐 부처와 공자의 위대한 가르침을 아는
    사람이라면 기독교회의 가르침을 믿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Syngman Rhee, “Autobiographical Notes”). 개신교인이 된 이승만은 예수
    교의 가르침이 서구문명의 융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고, 예수교의 가
    르침을 한국독립의 기초로 삼고자 했다.

  • ▲ 왕정개혁을 외치다가 반역으로 몰려 한성감옥에 갇힌 24세 이승만.ⓒ자료사진
    ▲ 왕정개혁을 외치다가 반역으로 몰려 한성감옥에 갇힌 24세 이승만.ⓒ자료사진
    이승만이 29세였던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로 인해 대한제국을 둘러싼
    국제정치의 큰 틀이 다시 요동치게 되었다. 1897년 독립을 선포한 대한제국의
    전신인 조선은 1637년 병자호란에서 청제국에 항복한 이후 1689년 청제국과
    러시아가 체결한 네르친스크조약체제 속에 있었고, 1895년 4월 17일 청일전쟁
    을 종결한 시모노세키평화조약 제1관에서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자
    국임을 확인했고, 1897년 청제국과 동등한 대한제국이 선포되었다. 그런데 다
    시 러일전쟁의 승패에 따라 대한제국의 독립이 위협받게 될 것이라고 본 이승
    만은 1904년 2월 19일부터 이 책의 원고를 집필을 시작했다. “독립요지”라는
    제목으로 탈고된 이 책의 서문은 6월 29일에 쓰여졌다(리승만 1910, f1-f2).

    이 책이 쓰여졌던 시대적 배경인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7일 제물포 앞바
    다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해군을 일본해군이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전쟁이었다.
    2월 8일 일본함대는 요동반도 남단의 여순(旅順, Arthur)항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해군함대도 공격했다. 1904년 1월 러시아 육군은 113만 5천명에 달했
    고, 러시아의 예비군과 국민군은 약 350만명에 달했다. 일본군의 총병력은 약
    120만명 정도였다. 이에 비해 1905년 경 대한제국 정부에서 집계한 대한제국
    군대의 병력은 8,842명에 불과했다. 러시아와 일본 중 어느 쪽이 승전국이 되
    든 대한제국의 독립을 기약하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이미 1902년부터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던 일본 군대는 1904년 4월 말에서 5월 초 사이에 압록강전투
    를 벌이며 만주로 진입해서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군대와 교전했다.
    저자는 “일아전쟁이 벌어지는지라... 감개격분한 눈물을 금치 못하야 그동
    안에 만들었던 한영사전2)을 정지하고 양력 이월 십구일에 이 글 만들기를 시
    작하니 당초에는 한 장 종이에 장서를 기록하여 몇만장을 발간하려 하였더니
    끊을 수 없는 말이 연속하는 지라... ” 원고가 길어졌다고 서문에서 쓰고 있다
    (리승만 1910, f1). 대한제국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대한제국의 자
    유독립을 위하야” “인민의 마음 속에 독립 두 글자가 있지 아니함이 참 걱정
    이라”는 생각에서 감옥 안에서 “급히 서둘러 이 책을 기록”하게 되었다는 것
    이다(리승만 1910, 21-24).

  • ▲ 이승만이 청일전쟁을 해설한 '청일전기' 표지.
    ▲ 이승만이 청일전쟁을 해설한 '청일전기' 표지.
    이처럼 러일전쟁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탄생한 이 책은 전쟁학(polemology)적 서술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의 제19분절에서 이승만은 미국의 남북전쟁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이승만은 제26분절 대한의 독립 내력에서 당태종에 맞서 승리한 연개소문의 역사, 항몽전쟁의 역사, 
    그리고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복전쟁에서 “일본의 군사가 고려에게 대패”한 역사 등을 서술했다. 
    이승만은 “조선 역사에 제일 큰 난리는 임진왜란이오 한인들이 제일 통분
    히 여기는 전쟁도 임진왜란”이라고 보았다.

    제26분절에서 병자호란의 치욕에 관해 길게 서술하고 있는데, 특히 병자호
    란 이후로 거의 삼백 년 동안을 소위 조공한다는 명색이 있었으니 “동국 오천
    년 사기에서 이렇듯 더러운 욕이 없는지라”라고 썼다. 북벌계획으로 전쟁을 준
    비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것과 관련하여 이승만은 유학을 숭상한다는 선
    비들이 “천명을 거역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 데서 그 이유를 찾았다.
    청나라가 우리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라고 분명히 선언한 갑오년 이후까지도 유
    교적 지식인들이 “청국을 배반하고 독립국이 되는 것이 의업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광무 연호를 사용한 책력은 보지 않는다고 하니 “도학(유학)을 숭상한
    다는 무리들의 독한 해가 이렇듯 심한지라 진실로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리로
    다”라고 썼다.
    청일전쟁과 관련하여 이승만은 “일본이 ... 임진년에 한번 시험하다가 실패
    한 후 삼백년 동안을 다시 예비하야 갑오전쟁에 그 욕심을 이루었다”고 하면
    서 “임진왜란보다 더 큰 난리가 갑오전쟁[청일전쟁]이오 한인에게 더욱 통분히
    여길 바”3)라고 보았다. 이승만은 독립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독립졍신』
    을 썼지만, 그러한 독립이 스스로 쟁취된 것이 아니라 청일전쟁의 결과 체결된
    시모노세키평화조약에 의해 인정된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옥중에서 『독립
    졍신』을 쓰기 앞서 청일전쟁에 관해 쓴 그의 원고는 1917년 하와이 태평양잡
    지사를 통해 『쳥일젼긔』로 출판되었다.
    1904년 2월 옥중에서 러일전쟁 발발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같은 달 19일
    부터 이 책의 집필에 착수했다. 안중근이나 김윤식과 같은 당대의 지식인들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을 기뻐했는데, 이승만은 이 책에서 “일인과 아
    인이 하는 일이 다 한가지”라고 보면서 승세를 잡은 일본 정부와 백성의 생각
    을 분석했다.

    옥중저작(獄中著作)인 이 책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옥중저작들과 다음과 같
    이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첫째,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신체적 구속 상태
    에서 쓰여진 절박성, 둘째, 저자의 신체적 구속을 초래한 정치권력과의 대척
    성, 셋째, 다른 문헌들을 충분히 참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쓰여진 간결성 등이
    다.
    감옥 안의 집필조건은 지극히 열악했다. 『독립졍신』에 앞서 청일전쟁에 관
    해 집필할 당시 이승만은 “종이가 없어 영자 신문지에 기록할 때, 밤이면 초를
    구해다가 석유통에 넣어 옥관들이 보지 못하게 하고 옮겨 썼다.”4) 1904년 『독
    립졍신』 집필 당시에는 환경이 나아졌지만 “당시 조정에서 독립협회를 해산한
    후 독립협회 가담자들을 나라를 어지럽힌 역적으로 몰아가고 있을 때인데 이
    글에서 독립이나 민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옥중의 저자로서
    는 큰 위험을 각오해야 했다. “당시 황실을 떠받들던 여론이 성행하여 어핍지
    존(語逼至尊, 말로 황제를 핍박)하는 자는 역적이라 하는 마당에 이 글에 공
    화, 헌법, 전제 등 정치제도에 대한 구별을 논하였기 때문”이었다.5)

  • ▲ 1898년 이승만이 23세때 창간한 한국최초의 일간신문 '매일신문' 창간호ⓒ자료사진
    ▲ 1898년 이승만이 23세때 창간한 한국최초의 일간신문 '매일신문' 창간호ⓒ자료사진
    옥중의 열악한 집필조건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단기간에 탈고될 수 있었던
    이유들을 다음과 같이 분석해볼 수 있다.

    첫째, 옥관(獄官)들이었던 김영선(金英善), 이중진(李重鎭) 등의 배려가 있었고, 충분하지는 않지만
    여러 참고도서들도 활용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옥중학교 설립에 감동한 선교사들의 도움과
    한성감옥 관리들의 양해 속에 옥중 서적실(書籍室)을 만들었는데, 이 서적실에
    는 약 250권의 책이 비치되었다. 1927년 연희전문 상과에 비치된 도서총수가
    269권이었다는 기록에 비추어보면 1900년대 초 이승만이 한성감옥에 설치한
    서적실의 규모는 작지 않았다.
    둘째, 이승만은 과거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여러 차례 응시하며 한학을 연
    마했던 동양적 지식인이었고, 1897년 7월 8일 배재학당을 졸업할 때까지 영어
    와 함께 신학문을 습득했던 서양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배재학당 재학시절 이
    승만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서재필(徐載弼 Philip Jaisohn,1864-1951)이었다.
    서재필은 1896(고종 33)년 7월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설립하고, 최초의 한글전용신문인 『독립신문』,
     그리고 최초의 영자신문인 The Independent를 발행했다.
    1896년 11월 서재필은 별도로 협성회(協成會, the Mutual Friendship Society)를 조직하여 학생들에게 찬반토론 훈련을 시켰는데, 이승만은 이 협성회의 창립 멤버였다. 1898년 1월 1일자로 협성회 초대 회장 양홍묵과 함께 주간지 『협셩회회보』를 창간하기도 했던 이승만은 1898년 4월 9일에는 유영석, 최정식 등과 함께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일간신문인 『ㅣ일신문』을 창간하여
    사장이 되었고, 같은 해 8월 10일에는 이종일과 함께 『뎨국신문』을 창간했고,
    최초의 근대적 기자(당시 명칭은 기재원)가 되었다.
    셋째, 저자는 수감 직후부터 계속해서 집필활동을 하고 있었고, 이 책은 그러한 옥중 집필활동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옥중에서의 선행저작들은 이 책의 기초가 되었다. 옥중에서 저자는 각종 서적을 번역하고, 영한사전을 편찬하고, 신문에 논설을 기고하는 등의 문필활동에 종사했다. 이승만은 옥중에서 한시(漢詩)를 지으며 울분을 달래기도 했는데, 이승만의 한시들을 모은 『替役集(체역집)』은 1961년 신호열(辛鎬烈)에 의해 번역, 출간되었다. 이러한 옥중에서 의 집필활동은 이 책의 기초가 되었다. 이승만이 옥중에 있던 1900년 제물포 에서 존스(George Heber Jones, 趙元時, 1867~1919) 선교사가 『신학월보』를 창간했는데,
    옥중의 이승만은 여기에도 기고했다.

  • ▲ 한성감옥의 종신죄수 이승만(왼쪽)과 동료죄수 이상재(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유성준(중앙)ⓒ자료사진
    ▲ 한성감옥의 종신죄수 이승만(왼쪽)과 동료죄수 이상재(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유성준(중앙)ⓒ자료사진
    이승만은 수감생활 중이던 1901년 2월부터 1903년 4월까지 2년 2개월간
    『뎨국신문』에도 익명의 논설을 기고했다. 옥중에서 비판적 신문 논설을 쓴 것
    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매우 특이한 경력이었는데, 『뎨국신문』에 게재했던 논설
    들은 이 책의 밑그림이 되었다. 서유럽에서 근대적 신문들을 통한 소통
    (communication)이 근대적 민족 공동체(community)의 기반이 되었듯이 순
    한글로 된 신문들은 근대적 한국민족주의를 선도했다. 저자는 순한글 신문의
    주필 등으로 활동했고, 신문에 발표했던 글들은 이 책에 포함되었다.

    넷째, 옥중동지들도 이 책의 집필에 도움을 주었고, 다른 지식인들의 생각
    들도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그의 옥중 독서 목록에서는 유길준의 『西遊見
    聞(서유견문)』이 발견된다. 1889년 늦봄에 탈고되어 1895년에 간행된 『西遊見
    聞』도 옥중은 아니지만 연금상태에서 쓰여진 책이었다. 이승만이 한성감옥에
    있을 때, 망명 중이던 유길준은 일심혁명회를 조직해서 일본에서 군사학을 배
    우던 한국인 청년장교들을 끌어들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유길준은 망명 중이
    던 일본에서도 다시 외딴 섬으로 유배되었고, 유길준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
    지만 먼저 귀국했던 동생 유성준(兪星濬, 1860-1934)은 한성감옥에 수감되었
    다. 유성준은 한성감옥에서 이승만을 만났고, 그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이 되
    었다.
    유길준의 『西遊見聞』은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 1835~1901)의 『西洋事
    情(서양사정)』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국가의 생존 발전과 인민의 삶에 대
    한 한국적 고민들이 많이 담겨 있다. 이러한 유길준의 고민은 이승만의 책에서
    도 이어지고 있다. 다만 『西遊見聞』이 국한문혼용체로 되어 있는 데 비해 『독
    립졍신』은 순한글체로 되어 있고, 유길준이 일본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던
    데 비해 이승만은 선교사들과 그들이 전해준 서적들을 통해 영미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차이가 있었다. 유길준의 『西遊見聞』이 동양문명에 기초해서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는 보수적 개혁을 추구한 국한문혼용체의 책이었던데 비
    해 이승만의 『독립졍신』은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의 경계선에서 순한글로 집필
    된 책이었다.7)
    이승만은 유길준과 같은 친일개화파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후쿠자와 유키치가 역설했던 것과 같은
    문명개화가 독립을 위해 긴요하다고 보았지만, 문명개화의 모델을 일본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찾았다.
    지리적으로 가까웠고, 동양문화권에 속해 있던 일본은 서구문명 전파의 손쉬운 통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일본을 넘어 미국이나 유럽을 모델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상하이 조계지들을 통해 전해진 한역(漢譯) 신서들의 영향도 있었지만, 서양선교사들을 통해 전달되는
    서적들을 영어로 직접 읽었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특히, 이승만은 이 책에서 지도층의 문명개화만을 지향했던 것이 아니라 백성의 문명개화를 통해
    독립을 이룩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백성들이 읽기쉬운 순한글로 이 책이 쓰여진 이유였다.
    저자는 이 책의 서문에서 “중등이상 사람이나 여간 한문자나 안다는 사람은 거의 다 썩고 물이 들어
    다시 바랄 것이 없으며, 또한 이 사람들은 자기 몸만 그럴 뿐만 아니라 이 사람들 사는 근처도 다 그 기운을 받아 어찌할 수 없게 되었으니”(리승만 1910, 1998, f2)라고 하면서,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 한글로만
    이 책을 집필한 동기를 밝혔다. 유교문명권 내에서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다년간 한학을 공부했던 이승만이었지만, 대중적 접근을 위해 순한글로 이 책을 집필했던 것이다.
    이 책의 초판본에 많은 시각적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는 것도 대중적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옥중에서 이승만은 이상재(李商在, 1850-1927), 이동녕(李東寧,
    1869-1940), 신흥우(申興雨, 1883-1959), 정순만(鄭淳萬, 1873-1911), 그리고
    박용만(朴容萬, 1881-1928) 등과 만났다. 특히, 이상재는 한 세대 가량 앞선 연장자로서
    이승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동녕은 1919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을 맡아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연대해서 활동했고, 이승만의 장기 궐석 시에는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도 했다(이현희 1995). 이승만에게 배재학당 입학을 권유했던 신긍우의 동생 신흥우는 이승만보다 먼저 출옥하면서 이승만에게 영어성경을 선물하기도 했다. 옥중동지 정순만은 나중에 연해주에서 활동했는데, 박용만, 이승만 등과 함께 독립운동계의 “3만”으로도 알려졌다. 옥중 동지들과의 공감대는 이 책에 반영되었고, 집필을
    촉진시켰다.

  • ▲ 1910년 프린스턴대학 윌슨 총장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자료사진
    ▲ 1910년 프린스턴대학 윌슨 총장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자료사진
    II. 『독립졍신』 출판의 역사

    대외적 독립을 위해 대내적 “헌법정치”를 지향하고 있는 이 책은 전제정을
    고수하고 있던 대한제국에서는 출판될 수 없었다. 이 책의 저자와 함께 수감생
    활 중이던 유성준은 독립협회를 제외하면 당시까지의 개혁운동이 대중을 교육
    하겠다는 생각을 갖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이승만에게 집필을 권유했고, 자신
    의 형 유길준이 돌아오면 그의 영향력을 통해 출판해주겠다고 제안했다(Rhee,
    n.d. “Autobiographical Notes,” 169).
    그러나 이승만이 1904년 8월 9일 다른 죄수들과 함께 출옥하고, 1907년 유길준이 일본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이 원고는 대한제국 안에서는 출판될 수 없었다.

    『독립졍신』은 1912년 2월 15일 일제의 조선총독부에 의해 압수되고, 『한국교회핍박』도 1913년 4월 출판 직후인 5월 30일에 압수되었으며, 두 책은 모두 발매반포가 금지되었다.

    아직 러일전쟁이 진행 중이던 시기에 출옥한 이승만은 민영환(閔泳煥), 한
    규설(韓圭卨), 김종한(金宗漢), 김가진(金嘉鎭) 등과 상의하여 러일전쟁의 전후처리를 둘러싼
    국제협상에 대비하고자 했다. 
    이승만은 1904년 11월 5일 오하이오(Ohio)호에 승선하여 목포, 부산, 시모노세키, 고베, 요코하마 등을
    거쳐 11월 2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11월 30일 시베리아(Siberia)호로 환승한 이승만은
    12월 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등을 거쳐 12월 31일 워싱턴, D.C.에 도착했다(『이승만일기』 2015, 14-20).
    1905년 8월 4일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Jr., 1858-1919)를
    만나는데 성공한 이승만은 1882년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의거하여 미국의 도움을 요청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공식외교통로를 통해 서한을 접수할 것을 권했으나 이미 미국은 가쓰라-태프트밀
    약을 통해 한국과 필리핀에 대한 상호지배를 양해한 바 있었다. 그나마 대한제
    국 주미 공사 직무대리 김윤정(金潤晶, 1869-1949)은 미국 국무부에 정식으로
    외교서한을 발송하기를 거부했다. 이후 이승만은 미국의 죠지 워싱턴대학, 하
    버드대학, 그리고 프린스턴대학 등에서 수학하면서 강연활동을 통한 일종의 공공외교를 전개했고,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 ▲ 1910년 프린스턴대학 윌슨 총장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자료사진
    이승만이 미국 동부에서 유학하며 활동하는 동안 감옥 동기였던 박용만이
    이승만의 아들 태산과 함께 이 책의 원고를 노끈처럼 말아서 트렁크 밑창에
    감추어 미국에 가져왔다. 1910년 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무로 있던
    문양목(文讓穆)이 이 원고의 출판을 맡았다. 문양목은 1907년 10월 대한보국
    회 중앙회장 및 대동공보사 사장에 취임한 바 있었는데, 김미리사(金美理士)
    등과 함께 로스엔젤레스에 대동신셔관을 설립했다. 이 책의 출판에 필요한 “경
    비를 조달하기 위해 철도에서 노동도 하고 혹은 포도와 오렌지와 홉을 따기도
    하여 이 책[초판본]을 발행”했다.8) 박용만이 쓴 이 책의 후서를 보면 출판이
    늦어진 경위와 더불어 난관을 뚫고 출판을 추진했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상재 씨에게 부탁하여 한번 비평을 듣고 다시 교정함이라... 그동안 이것을 출판
    하고저 한 지가 하루나 일년 뿐이 아니나 ... 애석히 여기는 것은 이것이 너무 늦게
    출판되어 그동안 시세와 형편이 달라져 혹 읽은 사람들이 재미를 잃을까 두려워하
    는 바라. 그러나 이 글은 원래 정치상 요령을 많이 만들어 말하여 본국과 외국의 고
    금 흥망을 비교하여 쓴 것인 고로,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응당 독립의 정신이 들고
    독립하는 사람이 되어 장차 조선에 도움이 되는 자가 될 줄로 믿노라(박용만 후셔,
    리승만 1910, f4).
    이처럼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한 결과 마침내 1910(융희4)년 2월 로스엔젤
    레스에서 이 책이 출판될 수 있었다. 뒷면에 표시된 정가는 미화 1원 50전(“뎡
    가금[美貨] 一元五十錢)이었다.9) 초판본의 294쪽 다음 쪽부터 쪽수를 표시하지
    않은 채 “본 책 저술할 때 본 저술가 리승만 본형태”라는 사진설명이 달린 이
    승만의 옥중 독사진(쇠사슬에 묶인 모습)과 더불어 여러 인물들의 사진들이 수
    록되어 있는데, 이 인물들이 1910년 이 책의 초판에 기여했다. 판권 부분에서
    “져술인 리승만”은 발행시(미국에 유학) 문학사라고 소개되고 있다. 이승만이
    하바드대학에 요청하여 1909년 여름학기 미국사 수업을 듣고 B학점 이상을
    받는 조건으로 하바드대학 석사학위를 받은 것은 박사학위를 받던 해와 같은
    1910년 2월 23일이었다. 따라서 이 책 출간 당시 이승만의 최종학력은 죠지
    워싱턴 대학 학사였다.
    이승만의 친우들 중 한 명으로 그의 전기를 쓴 올리버(Robert Tarbell Oliver, 1909-2000)는 
    “독립주의의 긴요한 조목”이라는 부록에 더해서 47개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34개장만이 옥중에서 
    집필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직접 출간을 담당했던 문양목에 따르면 “[이승만] 선생은 이 글을 다시
    교정할 여가가 없서 모모동지에게 맡겨 임의로 하기를 허락하였으나, 모모 동
    지는 또한 본문대로 세상에 전파하고자 하여 초본을 변치 않고 발행”했다(문양
    목 후셔, 리승만 1910, f8).
    문양목의 증언을 신뢰한다 하더라도 1910년 초판본에는 미국 대학의 학위
    복을 입은 이승만의 독사진을 필두로 저자가 옥중에서 구했다고는 보기 어려
    운 사진자료들이 수록되어 있는 점에 비추어 미국 동부에 체류 중이던 이 책
    의 저자가 미국 서부에서 출판을 추진하던 문양목 등과 상호 교류가 이루어지
    는 가운데 사진, 지도, 그리고 도화(圖畫)들이 추가되었다고 보여진다.
    1910년 초판본의 여백에는 “독립요지”라는 글자가 그대로 남아 있고, 목
    차도 “독립요지 목록”이라고 되어 있으며 본문 마지막 장에도 탈고(脫稿)의 의
    미로 “독립요지 죵”이라고 쓰여 있음을 볼 때, “독립요지”라는 제목이 “독립졍
    신”이라는 제목으로 바뀐 것은 출판의 마지막 단계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독자들이 독립의 요지를 이해하는 것에 더해서 독립의 정신을 공유하기
    를 바라는 적극적 의지를 담아서 최종 순간에 책제목이 “독립요지”에서 “독립
    졍신”으로 바뀌었다고 짐작된다.
    1910년 2월 이 책의 초판이 출간된 이후 이승만은 같은 해 7월 박사학위
    를 받았다. 이승만은 귀국하여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등에서 일했으나 105
    인 사건 발발에 즈음하여 신변의 위협에 직면하자 다시 미국으로 갔다. 1912
    년 2월 3일 미국 본토를 떠나 하와이에 정착한 이승만은 105인 사건을 다룬
    『한국교회핍박』을 1913년 4월 한재명(韓在明)이 운영하던 신한국보사(新韓國
    報社)에서 출간했다. 1917년 하와이에서 이승만은 과거 옥중에서 집필했던
    『쳥일젼긔』를 출간했고, 같은 해 『독립졍신』 제2판을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던
    태평양잡지사에서 출간했다. 그런데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제2판 역시 “시간이 없셔서 이 글을 좀 교정거나 첨부 말이 잇스나 세
    히 보지 못고 본문ㅣ로 재간오니 일후 고명신 선생들이 만히 참고
    야 교정심을 바라노라”라고 하였다.10)
    1945년 해방을 맞이한 이후, 이 책은 1946년 국민정신진흥회(한성), 1946
    년 활문사 출판부 등에서 우후죽순처럼 다시 출간되었다. “한성시 황금정 二정
    목六九”라고 주소지를 밝힌 활문사는 “단긔사천이백칠십구년,” 즉 1946년 3월
    재간은 이미 1917년에 있었으므로 이것은 오류라고 볼 수 있으며, 이승만의
    확인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활문사 본은 아래아 등을 없애는 등
    좀 더 읽기 쉽게 문체를 바꾸었으나 “륭희 사년”에 발행된 초판본의 형식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11) 1947년과 1953년 중앙문화협회(경성)도 이 책
    을 출간했고, 활문사 출판부는 1949년 제호를 한자로 표기한 『獨立精神』도 출
    간했다.
    이승만은 해방 이후 출판된 판본의 서문에서도 1917년 하와이에서 출간된
    재판본과 마찬가지로 “이미 인쇄를 다 끝내놓고” 저자의 서언(序言)만을 덧붙
    이는 형식으로 재출간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승만은 “세상 형편도 바뀌고 민
    중의 지식도 많이 발달된 오늘날에는 아무런 도움이 없을 것이나 혹 역사적
    유물로 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자주 독립을 완성하려
    는 정신을 키우는데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다행은 없다고
    생각하는 바”라고 해방 직후 이 책을 다시 출간하는 의미를 기록해놓았다. 
    해방 이후 아래아 등을 없애고 출간된 판본도 초판본보다는 낫지만 현대 한국인
    들이 읽기 쉽지 않았다. 다만 “반갑다 독립정신 이 책을 숨어 보고 숨어 외이
    던 이 책이... 광명등이 됩소사”라는 춘헌 이명룡의 찬사가 실려 있는 1954년
    태평양출판사본은 초판본이나 1917년 제2판과 마찬가지로 사진, 지도, 그리고
    도화들을 본문 중에 수록했다.12)
    1960년 4월 26일 저자가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이후 이 책은 다시 정치적
    금서가 되다시피 하다가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에 재출간되었다.
    장면정부 시기, 박정희 정부 시기, 전두환 정부 시기, 그리고 노태우 정부 시
    기 동안 재출간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장면정부는 물론 군사정권 하에서도
    이 책이 출간되지 못했던 이유는 5.16군사정변 주도세력이 5.16을 “군사혁명”
    이라고 부르면서 “4.19의거”의 계승을 천명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와 더불어 군인 출신 대통령들은 상무(尙武)정신의 함양을 위해 무
    장독립운동을 이승만의 외교독립노선 보다 더 선양하고자 하는 경향도 있었다.
    1993년 정동출판사에서 재출간된 판본은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이한빈(李漢彬, 1926-2004)이 출간사를 쓰고 본문을 읽기 쉽게 편집한 것이다. 
    이 정동출판사본은 1954년 태평양출판사본의 본문에 수록되어 있던 다량의 사진 및 도화들을 삭제하고, 
    고어체 한글을 현대한글로 바꾸었으나 가능한 원문은 그대로 살리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난해한
    한자어 뒤에는 본문에 없던 한자를 괄호 안에 넣어 삽입했는데, 이후에 나온
    재출간본들은 이 한자들을 그대로 두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순한글체로 쓰여졌던 원문의 정신을 
    계승하지 못했다.

  • ▲ 김충남-김효선이 현대어로 요약 출간한 '독립정신'(2010년). 표지사진은 조지워싱턴대학생 이승만.ⓒ자료사진
    ▲ 김충남-김효선이 현대어로 요약 출간한 '독립정신'(2010년). 표지사진은 조지워싱턴대학생 이승만.ⓒ자료사진
    1998년 연세대학교에서는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 조혜자 부부로부터 기증
    받은 이승만 문서들 중 일부를 『梨花莊所藏 雩南李承晩文書(東文篇)』 18권으
    로 발간하면서 제1권에 이 책의 초판 영인본을 수록했다. 1999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급변하는 오늘의 국제정세 속에 민족의 진로를 선도
    해야 하는 우리에게 하나의 정신적 길잡이가 될 것”13)이라는 박유철 당시 독
    립기념관 관장(이후 국가보훈처장, 광복회 회장)의 간행사와 함께 『독립정신』
    초판본을 영인본으로 펴냈다.
    2001년에는 연세대학교가 하와이대학 출판부(University of Hawai‘iPress)와 공동으로
    이 책의 영문번역본을 처음으로 출간했다.
    2008년 7월 19일 “건국 60년을 맞으면서” (사)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 기념
    사업회 회장 강영훈과 우남 이승만 연구회 회장 이주영은 대한민국 건국 60년
    기념사업위원회의 후원을 받아 김충남, 김효선이 작업한 『풀어쓴 독립정신』을
    출간했다. 이 책은 『梨花莊所藏 雩南李承晩文書(東文篇)』 제1권에 수록된 초
    판본을 저본으로 하고 1993년 정동출판사본을 참고하여 김충남과 김효선이 공
    동작업한 것이었다.17) 2010년 동서문화사에서 출간한 『독립정신: 조선민족이
    여 깨어나라!』는 2008년 청미디어판을 역시 김충남과 김효선이 더욱 “읽기 쉽
    게 풀어 쓴 것”이다.18) 그런데 이 책들 역시 1993년판 정동출판사본과 마찬가
    지로 로스엔젤레스 초판본과 하와이 재판본에 있던 사진, 지도, 그리고 도화들
    은 거의 수록하지 않았다.
    2017년 11월 대한민국사랑회(회장 김길자)는 대한민국 행정안전부의 지원
    을 받아 비봉출판사 대표 박기봉이 교주(矯註)한 『독립정신』을 같은 출판사에
    서 비매품으로 출간했다. 이 책은 2018년 5월 박기봉 교정본으로 비봉출판
    사에서 재출간되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사랑회본이나 비봉출판사본은 연세대
    학교 이승만연구원에서 제공한 사진 등을 일부 수록하고 있기는 하지만 원본
    에 수록된 사진, 지도, 그리고 도화들은 수록하지 않았다. 특히, 이승만의 초판
    본은 순한글로 되어 있는데 비해 대한민국사랑회본이나 비봉출판사본은 본문
    중의 여러 단어들에 괄호를 하고 한자를 병기하여 마치 이승만이 한자를 병기
    한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다.
    대한민국사랑회본(p. 327)이나 비봉출판사본(p. 337)은 이승만이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대표의 이름을 “으로쓰”라고 표기한 것을 오류라고 보았지만 당
    시에는 ‘r’발음을 하기 힘든 몽골알타이어족의 ‘r’ 발음을 돕기 위해 일부러 한
    글의 ‘o’음을 접두어로 삽입하곤 했다. 러시아를 ‘라사(羅斯)’라고만 표기해도
    될 것을 ‘아라사(俄羅斯)’라고 표기하거나,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의 기관지
    The Rocky의 한글제목이 ‘라키’가 아니라 ‘우라키’로 표기된 것과도 같은 이
    치이다. 이승만의 원본은 외래어를 표기함에 있어서 한글이 가지고 있던
    의성을 반영하고 있었다.

  • ▲ 연미복차림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장인 대통령 이승만(왼쪽)과 부단장 서재필ⓒ자료사진
    ▲ 연미복차림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장인 대통령 이승만(왼쪽)과 부단장 서재필ⓒ자료사진
    IV. 『독립졍신』의 주요 내용

    이 책의 초판본은 도입 부분, 본문 부분, 후록 부분, 그리고 권말 부분으로
    4분해 볼 수 있다. 도입 부분에는 『독립졍신』이라는 제목이 쓰여진 표지에 이
    어서 학위복을 입은 “져술가 리승만”의 상체 사진, 독립문 사진, 이승만의 서
    문, 박용만의 후서, 문양목의 후서, 문양목의 후서에 삽입되어 있는 신흥우
    와 박용만의 사진, 목록[독립요지 목록], 조선지도, 태조 이성계 초상, 고종황
    제 사진, 순종황제 사진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저자 자신의 사진을 수록한 것도
    참신한 시도였지만, 바로 다음에 독립문 사진을 게재함으로써 이 책의 주제를
    분명히 하였다.
    총 294쪽으로 된 초판본의 본문 부분은 장별 구분 없이 이어져 있고, 다만
    까만색 삼각형에 소제목이 달린 51개 분절들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 중에는
    약 100장의 사진들 및 도화들이 삽입되어 있는데, 본문의 내용과 관련된 것들
    로서 저자의 생각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효과는 물론 장별로 구분되어 있지
    않은 원본의 본문을 구분해서 독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본문은 제51분절 말미
    에 연미복을 입은 “외교가 리승만”의 전신사진과 충정공 민영환의 사진과 글
    씨로 끝을 맺고 있다.
    초판본 본문의 제51분절 다음에는 후록 “독립주의의 긴요한 조목”이 수록
    되어 있다. 이 후록에는 공자, 예수, 그리고 미국 대통령 태프트 및 미국 성조
    기 등의 형상이 소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권말부록에는 “본 책 저술할 때 본
    저술가 리승만의 본형태”라는 설명을 단 이승만의 전신 사진(상체가 쇠사슬에
    묶인), 책의 출간에 기여했던 이들로 보이는 다수 인물들의 사진들(문양목 포
    함)에 이어서 서지사항 및 도서정가가 표시되어 있다.






  • ▲ 이승만이 23세때 1898년 두번째로 창간한 일간신문 '제국신문'으로 감옥에서 이승만은 수백편의 논설을 써서 몰래 이 신문에 보내 게재하였다.ⓒ자료사진
    ▲ 이승만이 23세때 1898년 두번째로 창간한 일간신문 '제국신문'으로 감옥에서 이승만은 수백편의 논설을 써서 몰래 이 신문에 보내 게재하였다.ⓒ자료사진
    이 책은 원래 대외적 독립 수호를 위한 요지를 써서 대량으로 배포하고자
    집필을 시작한 것이기에 핵심논지는 두괄식으로 제시되어 있다. 제1분절에서
    제6분절까지에 걸쳐서 대외적 독립을 위해서는 더 이상 군주나 지배층에게 의
    존해서는 안되고 “나라집”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임금의 뜻에 따르는 것만을
    충성으로 생각하는 마음을 버리고 참으로 충성하는 근본을 깨달아 독립의 마
    음을 굳게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어서 “독립”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
    다. 제7분절에서부터 제10분절까지에서는 국제관계의 원리, 중립과 독립의 차
    이 등에 관해 설명하고 “스스로 독립해볼 생각”을 가질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제11분절부터 제14분절까지에서는 세계의 인문지리적 실상과 기술발전
    등 이 책을 읽는 한국인 개개인이 처해 있는 세계적 변화에 관해 설명해주고
    있다.
    대외적 독립을 이룩하기 위해서 대내적 정치제도의 변혁이 우선해야 한다
    고 보았던 저자는 제15분절부터 제21분절까지에서 전제정치, 헌법정치, 민주
    정치 등 세 가지 정치제도들을 구별하고, 미국과 프랑스의 민주정치를 자세히
    소개하면서 민주정치 보다는 헌법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한성감옥에 투옥되기 이전 이승만에 관해서는 “지금 우리가 이승만 개인의
    행동과 생각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가?”(『윤치호일기』 1899년 1월 9일)라
    거나 “성급하고 조심성 없는 정열적인 인물”(이정식 2005, 88)이었다는 평가도
    있으나 이 책의 제15분절의 말미에서 민주정치는 “동양 천지에서 결코 합당하
    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극히 위험한 생각”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그러
    면서도 저자는 제20분절까지에 걸쳐서 미국과 프랑스의 민주정치에 관해 설명
    한다. 결국 제21분절에서 “백성들의 권리를 얼마쯤 허락해 주어 피차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그로 인하여 상하가 다 평안 무사하고 나라도 나날이 흥
    왕하게”하는 헌법정치의 효험을 역설한다. 제22분절부터 제25분절까지에 걸쳐
    서는 정치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 그러기 위해서 백성의 마음이 먼
    저 자유하되 자유권리에도 방한(防閑, 한계)가 있음을 설명한다.
    제26분절부터는 단군조선 이래 대한의 독립 내력부터 청일전쟁까지의 역사
    를 서술하면서 서세동점의 세계사적 상황에서 취한 청국과 일본의 차이, 러시
    아제국의 대외정책, 1876년 일본과 체결한 조일수호조규, 1882년 임오난리,
    1884년 갑신정변, 1888년 미국 상주공사 부임, 그리고 청일전쟁의 근인과 청
    일전쟁 이후의 국제관계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제39분절부터 제51분절까지는 러일전쟁의 개전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되
    돌아보고 러일전쟁 개전 이후 대한제국이 처한 상황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특
    히, 제47분절부터는 일본인의 주의가 변화되고 있음에 주목하면서 청국, 일본,
    그리고 러시아로부터 해를 받은 대한제국이 좋은 기회를 여러 번 잃어버렸음
    을 지적하면서 대한의 독립과 관련하여 일본 정부의 주의와 일본 백성의 주의
    를 분석해보고자 하고 있다.
    이어서 후록 부분에서 한국민들이 취해야 할 독립주의의 긴요한 조목 6가
    지로서 (1) 세계와의 소통, (2) 새로운 입법, (3) 새로운 외교, (4) 국권 수호,
    (5) 공적 의리 존중, (6) 자유권리 존중 등을 제시하면서 이 여섯 가지가 왜 긴
    요한 지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 ▲ 한성감옥서 몰래 쓴 책 '독립정신' 원고를 꼬아 미국에 보낸 것을 펴보는 유학생 이승만.ⓒ자료사진
    ▲ 한성감옥서 몰래 쓴 책 '독립정신' 원고를 꼬아 미국에 보낸 것을 펴보는 유학생 이승만.ⓒ자료사진
    V. 결

    이상에서 1904년 옥중에서 집필되고, 1910년 미국에서 출간된 『독립졍신』
    집필과 출판의 역사, 그리고 주요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이승만 자신의 총체적
    삶이 이 저서의 내용과 완전히 부합되었던 것은 아니었고, 책의 내용 또한 많
    은 시대적 한계를 갖고 있지만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이 책의 함의는 당대의
    맥락 속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첫째, 이 책은 흔히 서세동점의 시대라고 불렸던 19세기 말 20세기 초 한
    반도에서 전개되었던 문명충돌의 경계를 살았던 20대 청년의 옥중 기록으로서
    그러한 문명충돌을 독자적 시각에서 해석하고, 그러한 문명충돌 속에서 나라의
    독립이라는 일관된 주제로 집필한 최초의 순한글 정치사상서였다.

    둘째, 이 책은 독립국들의 숫자가 증대되어 온 세계사적 흐름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러한 세계사적 흐름에 참여하고 있다. 저자는 대외적 독립을 지향했
    지만 대외적 독립운동이 복고적 고립, 나아가서 다른 외국으로의 복속으로 이
    어지는 부작용에 대해 경계했다. 이것은 이 책의 저자가 위정척사파, 친일개화
    파, 혹은 친러파 인사들과 달리 청제국, 일본제국, 러시아제국 등과 마찬가지
    로 제국주의적 속성을 보이기는 했지만 대한제국에 대한 지정학적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작았던 차악(lesser evil)으로서의 미국이나 프랑스를 모델로 삼았
    던 것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 ▲ 해방후 귀국한 이승만이
    ▲ 해방후 귀국한 이승만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며 반공투쟁을 외치는 연설장면.ⓒ자료사진
    셋째, 이 책은 군주나 지배층 보다 백성에게 기대하면서 백성 스스로가 독립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것은 이 책의 저자가 기독교, 특히 개신교를 통해 유교적 신분질서와
    유교에 근거한 중화주의적 세계관(유교 자체가 아니라)을 배격하게 된 것, 그리고
     “백성이 백성을 위하여 백성으로 조직된 정부”를 내세우는 미국식 민주정치를
     “제일 선미한 제도”라고 본 것과 맥을 같이한다. 
    16-17세기 유럽 종교전쟁 시기 가톨릭과 대립했던 개신교의 만인사제론(萬人司祭論)은 
    민주주의의 발전을 촉진시켰고, 종교전쟁의 결과 만들어졌던
    웨스트팔리아(Westphalia) 평화체제는 독립주권에 기초한 근대국제정치체제의
    시작이었다.
    넷째, 이 책은 미국식 ‘민주정치’를 최선의 제도라고 보면서도 과도기적으
    로는 황제와 백성이 협력하는 헌법정치를 통해 외세로부터의 대외적 독립을
    우선적 목표로 삼고 있다. 정치제도가 “백성”의 정도(수준)에 달려 있다고 보
    았고, 1897년 조선을 버리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선포한 고종황제에 대한 미련
    을 버리지 않았다. 황실을 존중하는 헌법정치는 저자가 이 책의 제20분절에서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프랑스대혁명 당시 왕당파에 반대했지만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던 진보우파(지롱드당)의 입장과 유사하다. 이 책의 저자는 군주정치에
    서 민주정치로 넘어가는 세계사적 흐름에 착목하는 동시에 민주정치 보다는
    헌법정치를 대안으로 제시했고, 헌법정치를 통한 군민협력을 통해 대외적 독립
    을 이룩하고자 했다.

    다섯째, 이 책이 한글발전사에서 차지하는 의미 또한 크다. 이 책에 앞서
    1895년 도쿄 교순사(交詢社)에서 처음 출간된 한국 최초의 근대 정치학 도서
    인 유길준(俞吉濬, 1856-1914)의 『西遊見聞』은 국한문혼용체였을 뿐만 아니라
    한자를 위주로 하고 조사 등을 한글로 표기한 정도였다. 비록 고어체를 사용하
    고, 현대문법과는 다르게 쓰여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 사어
    (死語)들도 많아 읽기가 쉽지 않지만 이 책의 순한글체는 이 책이 집필될 당시
    지식인들이 즐겨 읽었던 『皇城新聞』이나 1920년 4월 1일자 『東亞日報』 창간
    호의 국한문혼용체와 비교해보아도 가히 혁명적이었다.
    여섯째, 이 책은 독립을 위협하는 제국들과 맞설 자주적 힘이 부족한 상황
    에서 대한제국이 ‘중립’을 지향하는 것의 무망함을 지적했다. 이러한 국제정치
    인식은 중국이 주동이 되고 러시아와 일본이 보장하는 조선의 중립을 구상했
    던 유길준의 인식과 비교해보더라도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이승만은 한국이
    중립국이 되려면 보다 확실한 국제적 보장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문제의식은 1910년 프린스턴대학 박사학위 논문인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에 관한 국제정
    치사적 사례연구로 이어졌다(Rhee 1912).
    일곱째, 이 책은 책의 앞부분이나 후록 “독립주의의 긴요한 조목” 등을 통
    해 이 책이 지닌 계몽적이고, 실천적인 성격을 분명히 했다. 저자는 군민이 함
    께 추구해야 할 “독립주의의 긴요한 조목”들로서 세계와의 소통, 새로운 입법,
    새로운 외교, 국권 존중, 공적 의리 존중, 그리고 자유권리 존중 등을 1904년
    당시의 대한제국이 취해야 했던 진보적 방향이라고 보았는데, 이 조목들은 현
    재까지도 유의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