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대노총이 만든 재단법인에 "성과급 36% 기부하라"… 직원들 "사실상 임금 갈취" 비난
  • 한국전력공사(사장 김종갑)가 2만명 직원을 대상으로 받고 있는 '공공상생연대기금' 기부 약정이 사실상의 '기부 강요'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공공상생연대기금'(이사장 이병훈)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중심이 돼 설립한 공익법인으로, 일자리 창출 등에 도움을 주겠다는 명분으로 공기업들에게 기금을 모으고 있다. 

    지난 5일 김종갑 한전 사장과 최철호 전국전력노조위원장은 "일자리 창출 동참 등 사회적 가치 실현에 일조하고자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과의 기부 출연 약정식을 체결했다"며 직원들의 '협조와 배려'를 부탁했다. 

    직후 한전 본사 노무처가 '기부 약정 동의서'를 만들어 직원들에게 배포하고, 동의 현황을 관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동의서 취합 과정이 '협조와 배려'와는 동떨어진 방식으로 진행되면서 직원들이 반발하고 있다. 한전 측은 직원들의 기부를 유도하는 과정에서, 부서별 동의서 제출 현황을 표로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또 사측에서 개인별로 기부액을 특정하기까지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심지어 '동의'를 거부하는 직원들을 따로 불러 노무팀 면담까지 실시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 ▲ 지난 5일 한전 직원 2만명의 사내 메일함에는 김종갑 사장과 최철호 노조위원장 공동명의로 '사회적 연대 동참 협조'라는 제목의 메일이 보내졌다. ⓒ제보자
    ▲ 지난 5일 한전 직원 2만명의 사내 메일함에는 김종갑 사장과 최철호 노조위원장 공동명의로 '사회적 연대 동참 협조'라는 제목의 메일이 보내졌다. ⓒ제보자

    한전 직원들이 받은 동의서는 '기부 강요' 정황을 뚜렷이 드러낸다. 동의서는 "본인은 공공기관 직원으로서 최우선 국정과제인 청년실업 해소를 위한 사회적 연대 강화에 동참하고자 향후 지급받게 될 성과연봉(내부평가급, 경영평가성과급)에서 총 36%를 분할 공제해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에 기부하는데 동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부금 규모를 '성과급의 36%'로 일괄적으로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부 약정 동의서의 취합 마감일은 15일이다. 

  • ▲ 기부 약정 동의서. ⓒ제보자
    ▲ 기부 약정 동의서. ⓒ제보자

    한국전력의 성과연봉은 1년에 4회(3,6,9,12월) 지급된다. 간부의 경우 연봉월액의 12%씩 6,9,12월 3차례 공제하고, 직원의 경우 2018년 6,9,12월, 2019년 3,6,9월 총 6회에 걸쳐 공제한다는 계획이다. 대상 직원 2만명 전원이 기부 약정에 동의할 경우 조성되는 기금 규모는 200~250억 원 수준이다.

    한전 직원들은 블라인드(직장인 익명 모바일 게시판)·사내 익명게시판을 통해 강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기금조성의 구체적 목적, 사용처 등을 알려주지 않고 노조가 노무처를 통해 직원들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사업장에서는 부서장이 동의서를 들고 다니며 직원들의 기부 동의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전 관계자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이라며 정확한 답변을 주지 않았다.

    직원들은 청년실업 해소와 사회적 연대 강화, 즉 상생을 위한 기부를 받는다는 취지에는 동의한다는 분위기다. 그러나 사측이 '자발적 동의' 대신, 사실상 반강제적으로 걷어가는 모양새로 진행되는 상황은 수긍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 ▲ 지난 11일 한전 노조 익명게시판 '전력 아고라'에 게시된 글. ⓒ제보자
    ▲ 지난 11일 한전 노조 익명게시판 '전력 아고라'에 게시된 글. ⓒ제보자

    지난 11일 한전 노조 익명게시판 '전력 아고라'에는 '부장님 1:1 압박 들어온다'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노조 간부들, 당신들이 지키지 못하는 조합원은 흩어진 모래다. 부장님 1:1 압박이 들어오니 암담하다"며 "(기부 약정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부장 얼굴, 사업소, 동의한 사람들(의 체면을) 깎아먹는다고 한다"고 하소연했다. 해당 글은 12일 기준 조회수 2,550과 추천 50, 반대 0을 기록하고 있다.

    한전 직원들만 열람할 수 있는 사내 홈페이지 '파워넷'의 공문게시판에는 해당 동의서와 '동의율'을 취합하고 있는 엑셀 형식의 표가 공개돼 있다. 본지가 입수한 해당 자료 캡처 파일에는 한전 소속부서·(기부 약정 동의서) 대상인원·동의 인원·동의율이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다.

    문제의 동의서가 배포된 5일부터 블라인드 게시판에는 "본사에서 경영진 보고를 위해 동의율을 매일 취합할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며 "매일 직원 개개인별 동의 여부를 확인하라고 하는데, 마치 공산당인 것 같다"는 한전 직원들의 푸념 섞인 글들이 잇따라 올라오기도 했다.

     '동의율표'에 대해 한전 관계자는 "(노무처에) 알아본 결과, 동의율은 개인 급여를 공제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데이터 관리를 하기 위해 동의율 취합은 하고 있다고 한다"며 "(다른 의도로) 중간 집계는 하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하지만 직원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한전 직원 A씨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집계율이 명시된 표를 전 직원이 보는 게시판에 공지했다는 것은 (집행부에서) 직원들에게 일종의 압력을 가하는 것"이라며 "기부 동의서에 사인하지 않을 경우 불이익이 생긴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사측은 불이익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전 관계자는 "시대가 어느 때인가. 만일 그런 불이익이 있다면 난리 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전력 아고라'에 올라온 '부장 1:1 면담' 관련 글에 대해 "개인적인 불만사항이고, 부장과 진짜 면담했는지 사실관계가 드러난 것도 아니라 노무처에서 일일히 답하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겠느냐"고 해명했다. 

  • ▲ 최근 한전 노무처가 공개한 '노사현안 공유 설명회' ppt 자료 일부. 자료는 성과연봉제 인센티브 기부를 통한 사회적 연대 강화 동참을 독려하고 있다. ⓒ제보자
    ▲ 최근 한전 노무처가 공개한 '노사현안 공유 설명회' ppt 자료 일부. 자료는 성과연봉제 인센티브 기부를 통한 사회적 연대 강화 동참을 독려하고 있다. ⓒ제보자

    한전 내부 교육자료인 '노사현안 공유 설명회' ppt 자료 '4.대외 동향 및 진행 경과'란을 보면, '(성과연봉제) 반납 시행 여부에 대해 정부경영평가 시 평가위원이 확인', '미반납기관에 대해 정부 및 노동계로부터 먹튀 비난 여론', '직원 부담 최소화 방안 강구 및 경영평가위원 등의 부정적 여론 완화' 등이 명시돼 있다.

    직원 A씨는 "경영평가위원들이 '동의율'을 체크한다는 것은 사실상 '기부 약정에 동의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내지 '평가에 반영된다'는 의미로 보인다"며 "우리가 관리자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느냐에 따라 인센티브가 달라지기 때문에, 차라리 분란 일으키지 말고 사인해서 월급이나 제대로 받자는 말도 나온다"고 하소연했다.

    다른 직원 B씨는 "많은 직원들이 분노하고 있다"며 말을 꺼냈다. 그는 "적지 않은 금액이 나가는 문젠데 누구는 동의를 했느니 안 했느니 하고 있으니 기가 찰 따름"이라면서도 "말도 안 되고 자존심 상해서 사인 안 하겠다는 의견도 있지만, '어차피 우리 회사의 숙명'이라며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받아들이는 직원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한전 직원은 "너무 답답하다. 회사가 거대노조와 합심해 노동자 임금 갈취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은 양대노총의 공공부문 공동대책위원회가 지난해 12월 설립한 단체다. 공동대책위에는 민노총 65%, 한노총 35% 비율로, 364개 단위 노조가 참여하고 있다. 집행부는 노동계대표 6명, 사용자대표 4명, 공익대표 4명으로 구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