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 기세좋게 필리버스터 시작했다 선거구획정에 슬그머니 내려놓으려 하지만
  • ▲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가 진행중인 국회 본회의장 모습.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가 진행중인 국회 본회의장 모습.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테러방지법을 놓고 지난 23일부터 시작된 야당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가 1일까지 8일간 계속되고 있다. 당초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원내대표가 이날 필리버스터 중단 선언을 외칠 예정이었다. 그러나 세계 최장 기록을 세우는 등 야당 의원들이 '화풀이장'이 되며 세간의 주목을 모은 탓인지 오후 5시 현재까지 본회의장 단상에서는 지루한 연설이 이어지고 있다.

    국민적 관심을 모았지만, 2008년 광우병 파동 당시 벌어졌던 괴담 못지 않은 루머들이 국회 본회의장 연설 단상에서까지 쏟아지면서 이번 필리버스터 정국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일부 의원들은 노래를 부르거나 눈물을 흘렸고, 의장석에 상임위원장이 올라 의사봉을 쥐는 진기한 풍경도 연출됐다. 외신들도 우리 국회의 모습을 2011년 캐나다 새민주당(NDP)의 58시간 기록과 연관해 소개하기도 했다. 

    이번 필리버스터는 토론자들이 테러방지법에 대한 논리적인 반박보다는 의제와 큰 상관없는 내용이나 장문의 논문, 인터넷 댓글들을 모아 발언하는 등 질보다는 양에 무게를 두는 모습을 보이면서 기록경신장의 성격이 강했다는 평이다. 

    필리버스터 첫 토론자로 나선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의원은 그동안 테러방지법에 대해 했던 자신의 발언이나 국가 대테러 지침을 줄줄이 읽어 내려가며 5시간33분을 기록했다.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록을 깼다며 주목을 받았다. 

    3번째 주자로 나선 더민주 은수미 의원은 자신의 SNS에 자료를 올려달라고 요청하더니 댓글들과 헌법조항을 읽는 등 10시간 18분으로 기록했다. 역대 신기록을 세우는가 싶었으나 같은 당의 정청래 의원이 11시간39분을 기록하면서 최장기록은 정청래 의원에게 넘어갈 전망이다. 

  • ▲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강기정 의원이 무제한 토론을 하던 중 이석현 국회부의장의 격려 발언에 감정이 북받친 듯 발언대 뒤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시스
    ▲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강기정 의원이 무제한 토론을 하던 중 이석현 국회부의장의 격려 발언에 감정이 북받친 듯 발언대 뒤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시스


    토론자들이 눈물을 흘리거나 노래와 시를 낭송하는 장면도 연출됐다. 

    지난 26일 9번째 토론자로 나선 더민주 강기정 의원은 몸싸움하다가 사법처리를 당했던 경험을 말하며 눈물을 흘리다가 같은 당 이석현 국회부의장이 격려하자 단상 뒤에 주저앉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더니 강기정 의원은 마무리 발언에서 "제가 꼭 한 번 더 이 자리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며 노래를 시작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명박 정부 이후 공식석상에서 제창이 금지된 곡이라 강 의원의 노래는 또 한차례 논란이 됐다. 

    강 의원을 비롯해 몇몇 야당 의원들은 네티즌 댓글이라며 정부를 맹비난하거나 테러방지법의 내용을 왜곡하는 댓글을 수시간 째 읊어대기도 했다. 테러방지법이 통과되면 국정원이 국민을 감청할 것이라며 근거 없는 괴담을 소개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더민주 이학영 의원은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전봉준을 기린 김남주 신인의 '황토현에 부치는 노래'를 낭송하며 10시간 33분으로 두 번째로 긴 시간을 기록했다. 이학영 의원은 발언 중 여당 의원들과 설전을 벌였고 필리버스터를 방청하던 한 방청객이 고성을 질러 국회 방호원에게 이끌려 제지를 당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더민주 최민희 의원은 조지오웰의 소설 '1984'를 낭독하면서 '책 읽어 주는 여자'라는 별칭으로 트위터에서 회자되기도 했다. 

  • ▲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이 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테러방지법 수정을 요구하는 무제한 토론에서 눈물을 흘리며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이 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테러방지법 수정을 요구하는 무제한 토론에서 눈물을 흘리며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필리버스터 8일째인 지난 1일 단상에 오른 박영선 의원은 필리버스터 토론 중 눈물 범벅의 얼굴로 오히려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박 의원은 "필리버스터 중단은 총선에서 이기기 위한 결정"이라며 "4월 13일 야당을 찍어주셔야 한다. 야당에게 과반의석을 주셔야 한다. 더불어민주당에 힘을 주시고 야당을 키워주셔야 한다"고 눈물로 표를 호소하는 본말전도의 모습을 보였다. 

    속기사들은 본회의장 발언대 아래에서 24시간 2교대 근무를 하며 의원들의 노래와 시까지도 묵묵히 받아 써야만 했다. 

    장시간 서서 발언해야 하는 탓에 더민주 은수미·추미애·정청래, 정의당 박원석 의원 등은 운동화를 신고 발언석에 올랐다. 

    '3분 화장실 허용' 발언도 나왔다. 이석현 부의장이 물을 마시던 정의당 서기호 의원에게 3분내 화장실에 다녀와도 된다고 했으며 더민주 안민석 의원은 발언 중에 실제로 화장실을 다녀왔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상임위원장이 본회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필리버스터 닷새째인 27일 정의화 국회의장이 "체력적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부득 잠시간 본회의 의사진행을 부탁한다"며 체력적 한계를 호소, 상임위원장에게 의사봉을 넘긴 것이다. 

    필리버스터가 진행되는 시간은 본회의 중으로 간주돼 국회법에 따라 정의화 국회의장, 정갑윤·이석현 국회부의장은 3교대로 의장석을 지켜왔었다. 

    한편 더불어민주당은 이날 오전 9시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필리버스터와 테러방지법에 관한 '중대 발표'를 할 예정이었으나 발표 시간을 오후 의원총회 이후로 변경했다. 

    이종걸 원내대표는 전날(2월29일) 열린 잇달아 열린 의원총회와 비대위 심야 회의에서 김종인 비대위 대표와 일부 의원들의 중단 입장을 이기지 못하고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야당으로선 기세 좋게 필리버스터를 시작했으나 총선을 앞두고 선거구획정 문제 확대로 당내 반발이 거세지자 슬그머니 출구전략을 택하는,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끝날 것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