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기념관‥한중 광복ㆍ승전 70주년 '한중 우호' 상징
  • ▲ 상하이 매헌 기념관 외경.ⓒ보훈처
    ▲ 상하이 매헌 기념관 외경.ⓒ보훈처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29일 윤봉길 의사 의거 83주년 기념식이 열린 중국 상하이시 훙커우구 루쉰 공원 안 매헌기념관 광장 앞뜰. 윤 의사가 조국 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혈혈단신 망명한 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가 헌시로 낭독되자, 200여명 참석자들의 표정이 일제히 숙연해졌다.

    루쉰 공원은 윤 의사가 1932년 일왕 생일과 전쟁 승리를 축하하던 일본군 장성들에게 수통형 폭탄을 던진 장소로, 상하이 의거는 당시 한국 중국 양국 공히 꺼져가는 항일 투쟁 의지의 불씨를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매헌은 윤 의사의 아호다.

    매년 의거일(29일)에 맞춰 거행되는 기념식이지만, 올해는 중국 정부의 협조로 매헌기념관이 6개월의 보수작업을 거쳐 새롭게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달랐다. 특히 올해는 한국과 중국에게 각각 광복 70주년, 승전 70주년의 해로, 양국 정부가 직접 나서 기념식을 진행한 것은 처음이다. 그간 행사는 윤봉길기념사업회 등 민간 차원에서 이뤄졌다.

  • ▲ 상하이 매헌 기념관 내부 시청각 교육실.ⓒ보훈처
    ▲ 상하이 매헌 기념관 내부 시청각 교육실.ⓒ보훈처

    1994년 중국 정부가 20평 남짓의 부지를 내주면서 설립된 매헌기념관은 그간 전시물이 노후화 되고, 자료가 턱 없이 부족해 윤 의사의 숭고한 독립 정신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특히 공원 안에 별다른 표지판도 없이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어 중국인은 물론 한국 관광객들조차 지나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이에 보훈처는 홍커우구 측과 협력해 지난해 말부터 1억 5,000만원의 예산을 투입해 기념관 개보수 작업을 진행했다.

    공원 입구부터 ‘윤봉길 기념관’이란 한국어로 된 안내판을 내걸고, 윤 의사의 업적과 일대기를 다룬 영상물과 옥외전시물을 새로 제작하며 공을 들였다. 중국 정부 역시 기념관 주변 부지를 2,500평까지 늘려 정비하고 이 과정에서 루쉰 공원 일부를 폐쇄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최근 중국 정부는 중앙 정부 차원에서 각 지방에 방치돼 있는 독립 유적지를 리모델링하라는 독려 공문을 내려 보낼 만큼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분위기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도 승전 70주년을 맞아 항일 투쟁의 의미를 되살리는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까오샹 홍커우구구장은 “매헌 기념관을 지속적으로 보존하는 데 힘써, 매헌이 한중 양국 교류와 우호의 매개체가 되도록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매헌 기념관 리모델링을 시작으로 양국 정부는 보훈 외교 차원에서 항일 투쟁 기념 공동사업을 다각도로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1월 하얼빈 역 내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문을 열었고, 5월엔 시안 광복군 제2지대 표지석 설치, 충칭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현장 원형 보존도 결정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주변으로 추진되던 재개발도 우리 정부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현재 중단된 상태로, 5월부터 리모델링을 거쳐 오는 9월 3일 재개관이 예정돼 있다.

    광복70주년 민간 추진위원인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10년 전만 하더라도 윤봉길 의거 기념식에서 애국가도 부르지 못하게 하고, 태극기도 흔들지 말라고 할 만큼 배타적이었는데 중국 정부도 항일 투쟁을 고리로 한 한중 역사공조를 중시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이에 우리 정부도 중국 항일 독립 유적지 발굴 및 보존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방침이다. 박승춘 보훈처장은 전날 베이징에서 민정부 인사와 면담을 갖고 양국 정부 차원의 독립 유적지 보존 관리 지원을 논의한 데 이어 앞으로 중국 내 독립 유적지 관리를 담당할 인력도 중국에 따로 파견할 예정이다.

    기념식에 처음으로 참석한 윤 의사의 친손녀인 윤주경 독립기념관 관장은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는 단순히 일본으로부터의 독립뿐 아니라, 비도덕적인 제국주의에 항거했다는 점에서 전 세계적인 평화 연대 운동의 출발로 삼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봉길 의사(1908. 6. 21~1932. 12. 19)는 충남 예산에서 출생해 1919년 3ㆍ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식민교육을 배척해 학교를 자퇴하고, 사설 서당인 ‘오치서숙(烏致書塾)’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928년에는 ‘부흥야학원(富興夜學院)’을 설립해 농민의 자녀를 교육하고, 1929년에는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해 농민계몽운동과 농촌부흥운동, 독서회 운동을 전개했으며, <농민독본>을 편찬해 농촌 청년들에게 농민의 단결과 민족정신의 배양,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등 농촌운동에 헌신하다가 일제의 압박으로 중국으로 망명해 김구 선생이 이끌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거사를 자청했다. 

  • ▲ 거사직전의 윤봉길 의사 모습.ⓒ뉴데일리DB
    ▲ 거사직전의 윤봉길 의사 모습.ⓒ뉴데일리DB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맞아 일본군의 상해 점령 전승 경축식을 홍커우(虹口)공원에서 거행하자 의거를 감행해 일본의 수뇌부를 폭사시켰다. 의사의 거사는 우리 독립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으며, 조선과 중국의 항일연대에 크게 기여했다.

    의거 직후 현장에서 일경에게 체포된 의사는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았으며, 그해 5월 상해 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11월 18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가나자와 미고우시 육군 공병 작업장에서 총탄을 맞고 순국했다.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김구 선생의 요청에 의해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되어 1946년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국민장으로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