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산주의자의 자유

    장성택은 결코 개방파여서 죽은 것이 아니고,
    장성택이 살아있다고 해서 북한이 개방으로 나온다거나
    북한의 체제가 무너질 것도 아니었다
  • 전원책  
      
       장성택이 죽었다. 잔인하게 숙청됐다.
    죽어도 그냥 죽은 것이 아니고, 숙청을 해도 그냥 쫓아낸 것이 아니라,
     여러 정보를 종합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게 처형됐다.
    일각에선 기관총으로 전신을 난사하고 불태웠다고 한다. 

     도대체 누가 왜 그렇게 한 것인가를 두고 수많은 추측이 벌어졌다.
    평론가들과 대북 전문가들, 그리고 탈북자들의 의견을 내놓았다.
     그들 대부분의 의견은 장성택은 북한의 확실한 2인자였고
    김정은의 고모부로서 어린 처조카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후원세력이었는데,
    김정은을 옹위하는 군부세력과의 갈등에서 밀려났다는 것이다.
     여려 견해들이 난무한 가운데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장성택이야말로 개방파고 경제를 아는 자다.

     그래서 중국과 대단히 가깝고
    중국 정부 역시 아직 철부지인 김정은보다는 장성택과의 대화를 선호했는데
    이제 장성택의 처형으로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도 어렵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여기까진 맞는다고 치자.
    그런데 가장 큰 착각은 공산주의자가 개방을 선택하면
    마치 평화를 사랑하고 자본주의자처럼 행동할 것이라는 점이다.

     한 예를 본다.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은 1920년대 파리 유학파다.
    그들은 파리에서 자본주의를 구경했고 1차 대전 뒤 번영했던 파리의 풍요를 경험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마르크스를 배웠고 모스크바로 건너가 마르크스가 어떻게 실전적으로
     응용되는지를 익힌 뒤 중국으로 돌아왔다.

     중국엔 정규교육이라고는 4년밖에 받지 못한 마오쩌둥이
    새로운 공산당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북경대학 도서관에서 사서(司書) 일을 하면서
    리다지오 교수에게서 볼세비키를 배운, 어떤 의미에서는 자생적 공산주의자였다.

     그들을 일체적으로 만든 것은 1934년 대장정이다.
     이 대장정은 마오쩌둥을 확고한 1인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2인자 3인자들은 겸손했다.
     나중에 마오쩌둥이 쟝제스를 몰아내고 중국을 장악했을 때에도
     이들은 마오쩌둥 뒤에 철저히 그림자로 있었다.

     그것이 1971년 비명에 간 린뱌오와 달랐다.
    무엇보다도 그들 두 사람이 린뱌오와 다른 점은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개방만이 살 길임을 알고 있었던 ‘주자파(主資派)’란 점이었다.
     그 주자파는 1966년 시작돼 10년간이나 계속된 문화혁명 때
     대부분 반 마오쩌둥파로 몰려 숙청됐다.

     그런데 그 둘은 살아남았다.
    저우언라이는 철저히 자신을 낮췄고 그 누구보다도 검소했다.
    그리고 저우언라이가 덩샤오핑과 다른 점은
    그가 누구보다도 투철한 공산주의자였다는 점이다.
    그런 2인자 저우언라이가 주자파 동지 덩샤오핑을 죽음에서 건져냈다.

     여기서 하나 주목할 점이 있다.
     많은 서방의 평론가들과 언론은 당시 덩샤오핑이
    공산주의자가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내놓았고
    심지어는 저우언라이도 그랬다는 평가를 아직까지 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최소한 저우언라이는 죽을 때까지 공산주의자였다.

     저우언라이는 27년간 거의 잠을 자지 않고 마오쩌둥을 도와 ‘공산주의 혁명’을 완성한 자다. 1976년 그가 죽었을 때 남긴 재산은 5천 위안이 전부였다. 가족조차 없었다.
    죽기 전 그는 장례식 때 친척들이 북경에 오지 말 것과
    오더라도 정부에서 한 푼도 지원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가 죽자 유엔 사무총장 발트하임은 그의 청빈을 기린다면서
    유엔에 조기를 걸 것을 지시했지만 그건 발트하임의 착각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청빈했던 것이 아니라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였던 것이다.

     덩샤오핑은 저우언라이와는 달랐지만 그 역시 공산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백묘흑묘론’을 편 것으로 유명한데,
    서방의 기자들에게 사회주의(덩샤오핑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곧 공산주의를 의미한다)의
    최종적인 승리를 장담하곤 했다.

     장성택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북한에서 김정은이 밝힌 바대로 도덕적 타락을 했을지 모르지만
    그 역시 공산주의자임은 명백하다.
    오히려 왕조국가이자 사이비 종교국가인 북한에서
    그 자신의 사상이었던 공산주의가 충돌했을 가능성이 있다.

     원류 공산주의가 살아 있었던 구소련에서 누가 세습을 꿈꿀 수 있었는가?
    절대권력을 누렸던 스탈린조차 세습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뜻에서 북한에 제대로 된 공산주의자가 있다면
     김정은의 3대 세습에 내심으로 승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장성택이 그런 원류 공산주의자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공산주의의 기본사상에는 충실했던 자라고 믿는다.
    그래서 생긴 불승복은 이른바 백두혈통이라는 김정은을 철저히 우상화하는
    군부 강경파에게 빌미를 주었을 것이다.
     그 결과 ‘박수를 건성건성 치는’ 것까지 그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유가 되었다.

     결론은 이렇다.

    장성택은 결코 개방파여서 죽은 것이 아니고,
    장성택이 살아있다고 해서 북한이 개방으로 나온다거나
    북한의 체제가 무너질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리 언론의 추측처럼 이설주와의 ‘특별한 관계’가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도 아니었다.
    그를 죽게 만든 건 김정은의 주변에 권력이 분산되는 징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군부 강경파와 김정은의 직계인 김원홍과 조연준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김정은의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그는 무참하게 처형됐다.
    아마도 고모부도 죽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한
    혈기방장한 김정은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공산주의에서 파생된 사이비 종교국가는 이처럼 무섭다.
    1인자에게 반대하거나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면 반드시 처형된다.
    그것이 생존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런 세계에서는 원류 공산주의자도 살아남기 힘들다.
    그가 주자파든 스탈린주의자든 수정주의자든 마찬가지다.
    장성택 같은 공산주의자에게 자유란
    기껏 ‘박수를 건성건성 치는’ 정도의 자유여서
    인간의 본원적인 갈증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는 죽었지만,
    내가 염려하는 것은 ‘열렬한 박수’로 상징되는 맹목적인 우상화에 익숙한
    사교집단들이 최종적으로 생존의 기로에 섰을 때
    우리와 함께 죽자고 나설지도 모르는 무모함이다.(Konas)

    전원책 (변호사 / 자유경제원장)

    본 내용은 월간 자유 2월호에 게재된 글임.(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