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운동하다 일제의 전방위 압력에 한계 깨닫고 중국 망명1932년 일본군 수뇌부를 폭사시켜 동북아 항일운동의 새로운 전기 마련
  •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16일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79주기 추모식’을 19일 오전 11시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윤봉길 의사 묘전에서 (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회장 김학준) 주관으로 연다고 밝혔다.

    추모식은 박유철 광복회장, 최완근 서울지방보훈청장을 비롯한 독립운동단체장과 광복회원, 기념사업회원, 일반시민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사업회장의 식사(式辭), 서울지방보훈청장과 광복회장의 추모사, 헌화․분향 순으로 진행된다.

  • ▲ 홍구공원 의거 전 윤봉길 의사의 사진. 수억 중국인들은 지금은 일제를 비난하지만 당시에는 제대로 저항할 엄두도 못냈다. 그런 상황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중국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 홍구공원 의거 전 윤봉길 의사의 사진. 수억 중국인들은 지금은 일제를 비난하지만 당시에는 제대로 저항할 엄두도 못냈다. 그런 상황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중국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식민교육을 받을 수 없다며 학교를 자퇴하고 오치서숙(烏致書塾)에서 한학을 배웠다. 1927년에는 구매조합을 조직해 농민들의 경제자립을 독려했고, 독서회(讀書會)를 통해서 문맹퇴치에 힘썼다.

    윤 의사는 1928년 부흥야학원(富興夜學院) 설립, 1929년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해 농민의 단결과 민족정신의 배양,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등 농촌운동에 헌신했다.

    하지만 윤 의사는 일제의 전방위 압박이 있는 상황에서는 농촌운동이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1930년 3월 6일 중국으로 망명했다.

    윤 의사는 1932년 봄에 상해 홍구(虹口) 일대에서 야채장사로 위장해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던 중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자 한인교포단장인 김 구 선생을 만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만나 독립운동전략을 논의하게 됐다.

    같은 해 윤 의사는 4월 29일 일왕의 생일(천장절. 天長節)을 맞아 일본군이 여는 상해 점령 전승경축식이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들을 사살하기로 결심한다.

    1932년 4월 29일 11시 40분, 홍구 공원의 전승식장에 들어간 윤 의사는 김 구로부터 받은 물병 폭탄 1개와 도시락 폭탄 1개를 단상 위로 던졌다. 이 폭탄으로 일본군 수뇌부를 폭사시켰다.

    윤 의사의 ‘의거’는 순식간에 중국은 물론 한반도와 일본에까지 전해졌고,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윤 의사의 용기에 감동받은 중국인들은 우리 민족과의 항일연대를 더욱 강화했다.

  • ▲ 2008년 발행한 윤봉길 의사 탄신 100주년 기념 우표.
    ▲ 2008년 발행한 윤봉길 의사 탄신 100주년 기념 우표.

    한편 의거 직후 현장에서 잡힌 윤 의사는 1932년 5월 25일 상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1월 18일 오오사카(大阪) 육군 위수(衛戍) 형무소에 수감됐다.

    윤 의사는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일제에게 26발의 탄환을 맞고 순국하셨다. 당시 25살이었다.

    이국땅에서 순국한 윤 의사의 유해는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1946년 봉환되어 1946년 7월 7일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안장했다.

    정부는 윤 의사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