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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배, 이정렬, 두 부장판사는 소위 ‘진보성향’이다. 이들은 한미FTA 비준을 놓고 정권을 비난한 뒤 ‘정치중립성’을 놓고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 ‘판사도 정치성향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은 여태껏 자신들과 같은 성향을 가진 일부 판사들이 고참 판검사들에게 손가락질 하며 ‘정치판사’라는 딱지를 붙여 떠나게 만들었다는 건 말하지 않는다.
‘대중 인기’ 먹고 사는 게 ‘진보 판사’?
“뼛속까지 친미(親美)인 대통령과 통상 관료들이 서민과 나라 살림을 팔아먹은 2011년 11월 22일, 난 이날을 잊지 않겠다.(22일, 최은배 인천지법 부장판사)”
최은배 부장판사는 한미FTA비준 직후 대통령과 통상 관료들을 ‘매국노’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린 후 공개했다. 이후 최은배 판사는 SNS세상에서 이른바 ‘영웅’이 됐다.
24일까지 330명이던 최 부장판사의 페이스북 친구는 사흘 만에 200명이 늘었다. 최 부장판사는 26일 "친구 요청 440명, 수락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좀 기다려주세요"라고 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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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은배 인천지법 부장판사의 페이스북. 그는 이번 일로 페이스북 '스타''가 됐다.
‘추종자’들은 최 부장판사의 페이스북에 “사법부의 희망이십니다” “판사님이 곧 '정의'이셨습니다” 같은 ‘아부성 글’을 수십 건 올렸다. 여기에 최 부장판사는 모두 '좋아요'를 눌렀고, 일부 글에는 "세상은 외롭지 않다는 걸 느낍니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최 부장판사는 트위터에서도 ‘영웅’이 됐다. 최 부장판사의 팔로어는 발언 전 30명에서 2만2,000여 명으로 급증했다. 최 부장판사는 신이 난 듯 “많은 분이 격려 글을 올려주셔서 너무 고맙다. 연대가 무엇인지 새삼스레 느낀다”고 트윗을 올렸다.
일각에서 ‘판사가 공개된 공간에서 자신의 정치성향을 그대로 드러낸 건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일자 그와 같은 ‘우리법연구회’의 이정렬 창원지법 부장판사가 이어 글을 올렸다.
이 부장판사는 지난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드라마 계백을 보고 있다. 황산벌 전투가 나온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과 자신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사람들”이라는 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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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렬 창원지법 부장판사의 페이스북. 그 또한 대놓고 한미FTA 비준에 반대하고 있다.
25일에는 “비준안을 통과시키신 구국의 결단. 결단을 내리신 국회의원님들과 한미 안보의 공고화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시는 대통령님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이것도 정치편향적인 글”이라고 반어법으로 비꼬기도 했다.
‘정치판사’ 단어, 누가 먼저 사용했나
최 부장판사와 이 부장판사 등 소위 ‘진보 진영 법조계’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SNS는 소수 친구나 회원만 공유하는 사적 공간이다. 따라서 SNS 사용자가 법관이든 그 누구든 어떤 주장을 하든 사생활 영역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부장판사는 이에 더해 지난 26일 “진보 편향적인 사람은 판사를 하면 안 된다는 말이겠지. 그럼 보수 편향적인 판사들 모두 사퇴해라. 나도 깨끗하게 물러나 주겠다”는 글을 올리며 ‘판사도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을 폈다.
하지만 이들은 지난 20년 동아 ‘정치판사’라는 낙인을 찍어대며 선배 판-검사들을 물러나게 했던 게 누구인지는 잊은 모양이다.
80년대 이후 지금까지 집회 및 시위 관련법, 국가보안법, 병역법 등 현행법을 위반한 사람이 사법처리를 받을 때마다 해당 피의자들은 물론 그들의 변호사들가지 가세해 담당 판-검사들을 향해 ‘정치판사 물러나라’거나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라’고 외치며 집단행동을 해왔다. 여기에 더해 특히 ‘자칭 진보성향 판사’들은 ‘사법개혁’을 이유로 여러 차례 항명사태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들이 수십 년 동안 주장한 게 바로 ‘정치적 중립성’이었다. 그런데 자신들이 ‘정치 편향성’을 나타내는 건 괜찮다니, 대체 뭔 말인가. 자기네는 무조건 ‘예외’라는 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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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대 사법파동 일지. 그 중 2009년 신영철 대법관의 '발언'에 들고 일어난 적도 있다. 당시 '진보 판사'들은 신 대법관을 '정치판사'라며 몰아내려 했다.
문제는 SNS가 아닌, 법관의 자세
최 부장판사와 이 부장판사의 페이스북 글로 파문이 일자 대법원은 29일 공직자윤리위원회에 법관과 법원공무원의 SNS 사용에 대한 가이드라인 제정을 안건으로 올렸다. 위원회에서는 최 부장판사가 올린 글의 적절성과 법관윤리강령 위반 여부도 심의한다고 전했다.
대법원은 이미 양승태 대법원장 지시로 법관들의 SNS 사용에 대한 문제점을 파악하고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대법원은 “SNS는 전파성과 공개성을 갖고 있어 사적인 공간만으로 볼 수 없고, 이번 사건은 SNS가 '1인 방송국'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대법원의 이런 고민은 핵심을 놓친 것 같다. 지금 문제는 SNS가 아니라 법관의 편향된 사고방식과 태도 아닌가.
만약 최 부장판사나 이 부장판사 같은 사람이 향후 FTA와 관련한 사건을 맡게 된다면 누가 그 재판을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믿겠는가. 이들 외에도 지금까지 법에 따라 국가보안법이나 병역법, 집회 및 시위법 위반자들을 엄단했던 선배 법조인들에게 ‘수구정치판사’라는 주홍글씨를 찍어 손가락질하며 쫓아낸 사람들의 ‘편협하고 왜곡된 자세’가 문제 아닌가.
사법부의 핵심 가치는 ‘공정한 재판을 통한 권리 구제’라고 들었다. ‘미국도 법관들의 SNS 사용을 금지하거나 자제하도록 권고하고 있다’는 주장은 들먹이지 않겠다. 그 전에 판사는 ‘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꾼’이 아니라 ‘법에 따라 판단하는 관리’라는 걸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문제의 두 부장판사가 자신들의 정치적 성향과 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이마저 잊어버린 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