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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기습 처리였다.” 22일 한나라당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강행처리 과정을 민주당은 이렇게 표현했다. 규탄을 한다기 보다는 극도의 분노 혹은 허탈한 표정이었다.
민주당은 한나라당이 오후 2시 의원총회를 연 뒤 3시7분 본회의장에 입장할 때까지 낌새조차 채지 못했다. 박희태 의장과 남경필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장은 민주당 김성곤 의원(오후 2시30분)과 강창일 의원(오후 3시)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 민주당은 박 의장과 남 위원장이 행사에 나타난 것을 보고 안심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미 그 시간 한나라당 의원들은 본회의장에 입장하고 있었다. 이를 맨 처음 발견한 것은 민주당 강기정 의원. 강 의원은 국회 본청 후문이 막혀있는 것을 보고 의심스런 마음에 본회의장을 찾았다가 컴컴한 어둠 속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이 착석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뒤늦게 사실을 안 민주당은 3시9분 의원들을 향해 본회의장에 집결하라는 긴급 메시지를 전송했지만 의장석 주변은 이미 국회 경위가 버티고 서있어 정의화 국회 부의장의 의사진행을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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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회 본회의에서 한미FTA(자유무역협정)비준안 이 통과된 22일 오후 야당의원들이 발언대에 앉아 허탈해 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이날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등 야당 의원들의 강력 저지 속에 비준안을 표결에 부쳐 재적의원 295명중 170명이 참석한 가운데 찬성 151명, 반대 7명, 기권 12명으로 비준안을 통과시켰다.ⓒ연합뉴스
손학규 대표는 비슷한 시각 같은 당 강창일 의원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 상황을 전해듣고 축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본회의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손 대표는 축사에서 “한나라당이 본회의장을 기습 점거하고 경호권을 발동했다.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는 강압에 의한 평화, 힘으로 밀어붙이는 평화는 아닐 것”이라며 말한 뒤 급히 발걸음을 뗐다.
김진표 원내대표 역시 김 의원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가 3시20분에 이 소식을 듣고 급거 본회의장에 입장했다. 그는 오전 한나라당 황우여 원내대표를 만났지만 강행처리 낌새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한나라당 의원만의 기습 입장 작전은 시작 직전까지 소속 의원들에게도 비밀로 부쳐졌다. 남 위원장은 이날 “(기습 상정에 대해)나도 알지 못했다”고 했다.
야권 관계자는 “박 의장과 남 위원장이 없는데 설마 기습 상정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허무하다. 전날(21일) 저녁 박희태 의장과 황우여 원내대표가 만나 비밀리에 진행한 것이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뒤이어 민주당,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속속 본회의장에 도착했지만 손써볼 방법이 없었다. 민주당은 FTA 처리를 반대하는 플래카드를 본회의장에 내걸었다 경위들에게 제지당하고, 민노당 김선동 의원은 최루탄을 터뜨리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민주당 의원들은 의장석 주변을 둘러싸고 정 부의장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강하게 항의했다. 민노당 이정희 대표는 제안설명을 하러 나오는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을 제지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비준안이 처리되자 무효라고 외치며 항의했지만 이후 FTA 이행법안이 줄줄이 처리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 의원은 정 부의장이 의사일정을 진행하지 못하도록 의사봉 판을 빼앗아 이정희 의원에게 넘겨줬지만 경위들이 나서서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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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당 김선동 의원은 최루탄을 터뜨리는 모습. ⓒ 연합뉴스
표결이 모두 끝나자 야당 의원 50여명은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대책회의를 열었고, 비준안 처리 무효를 주장하며 본회의장 농성에 들어갔다.
민주당 손학규 대표는 대책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이 정권이 또다시 쿠데타를 저질렀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정동영 최고위원은 "이번 FTA는 국민에 의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 졸개에 의한 쿠데타"라고 성토했다.
민노당 권영길 의원은 "이명박 한나라당 정권이 스스로 무덤을 팠다"고 비판했고, 무소속 조승수 의원은 "대한민국 국회는 죽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당 추미애 의원은 본청을 나가며 "민주당이 23일 통합 논의를 위한 중앙위원회 준비에 몰두해 있는 것을 알고 허를 찌른 국민적 기만행위"라고 분을 삭이지 못했다.
경호권 발동으로 본청에 입장하지 못하던 야당 보좌진은 법안 처리가 끝난 5시23분 본청에 진입했지만 한나라당을 향해 "나라를 팔아먹고 이렇게 나오느냐", "매국노, 이완용"이라고 분풀이를 하는 데 그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