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태 국회의장 등 참석
  • 미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펼쳤고 초대 대통령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초석을 놓은 ‘우남 이승만 박사 46주기 추도식’이 19일 오전 10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사)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회장 이기수) 주관으로 열린다.

    우남 이승만 박사(1875년 3월 26일~1965년 7월 19일)는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출생했다. 1896년 서울에서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고 <협성회보(協成會報)>라는 주간신문을 발간, 주필이 되어 정부 비판을 전개했다. 협성회보가 정부의 탄압으로 폐간되자 최초의 민간 일간지 <매일신문(每日新聞)>을 창간, 주필로서 계속 활동했다.

    1898년 고종 황제의 노여움을 사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이승만 박사는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전단을 배포하였는데, 이로 인해 징역 7년형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 때 그의 정치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독립정신’을 저술했다.

    이승만 박사는 ‘독립정신’에서 국제간의 외교와 외국인과의 친선의 필요성, 낡은 사고방식에서의 탈피, 국권 존중과 자유권을 소중히 할 것을 주장했다.

    1904년 11월 미국으로 건너간 박사는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 등에서 공부하면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10년 귀국했다. 1912년 세계감리교총회 한국대표로 임명되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 근거를 두고 <한국․태평양신문>을 발간하고, 박용만․안창호와 협력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4월에 상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며, 1921년 5월 워싱턴 군축회의,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야만성과 침략행위를 폭로했다.

    1940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이던 이승만 박사는 국민들의 단결을 호소하는 육성방송으로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기도 했다. 일본이 패망하자 1945년 10월 16일 귀국하여 “뭉치고 엉키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못 사나니 다 같이 하나로 뭉치자”고 역설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정부에서는 우남 이승만 박사의 공훈을 기리어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19일 이승만 박사 추도식은 박희태 국회의장,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박세환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 독립운동관련단체장 및 광복회원, 기념사업회원, 유족, 학생 및 시민 등 8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례, 고인의 말씀(육성녹음), 국회의장·국가보훈처장·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의 추모사에 이어 이어 분향 및 이인수 박사의 유족인사 등으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