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동란 후 국제규격 스키장 개설에 노력국내 스키 역사…근대사 만큼 '파란만장'
  • ▲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스키장인 용평스키장.ⓒ용평리조트
    ▲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스키장인 용평스키장.ⓒ용평리조트

    김일성의 남침으로 일어난 6.25 동란이 온 산하(山河)를 황페시키고 휴전된지 6년후인 1959. 전란이 남긴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고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모두가 애쓰던 때였다.

    이 해 1월13일 쨍 소리가 날 정도로 추운 날에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서 국무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대관령에 스키장을 만들도록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이 대통령은 또 비율빈(필리핀)에서 국제회의를 빈번히 개최하고 있는데,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보고 그러한 회의는 국제적 위신을 올리고 외화 획득하는 데도 도움이 되는 것이니, 외무와 공보에서 그 유치를 적극 추진하도록 하라는 당부를 했다. 전쟁으로 나라꼴이 말이 아니지만, 미래를 내다보고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국격을 높이는 일을 찾아볼 것을 주문한 것이다.

  • ▲ 인물화 이승만대통령(김종선 작가) ⓒ 6.25전쟁기념미술대전조직위원회 제공 ⓒ
    ▲ 인물화 이승만대통령(김종선 작가) ⓒ 6.25전쟁기념미술대전조직위원회 제공 ⓒ

    일주일 후인 1월 20일, 경무대에서 국무회의가 다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대관령 스키장 진행상황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그리고 수목을 다소 베야 한다고 한다. 잘 만들어 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

    최재유 당시 문교부장관은 지방유지의 협력을 얻어서 적극 추진하고 있다. 소요경비 10,000만 환 중 지방유지로부터 수합된 금액이 약 800-900만 환이라고 보고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6.25 동란 이후라 스포츠라고 해봤자 육상과 축구 정도에만 국민적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동계 스포츠, 그것도 스키장을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앞서가는 생각이었다. 이 대통령 특유의 국제적 감각이 빛을 발한 것이다. 동계 스포츠를 통해 국제사회에 우리나라를 부각시켜야 한다는 이 대통령의 이같은 선견지명(先見之明)은 향후 동계스포츠 발전에 큰 힘으로 작용했다.

    이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스키장 개발은 4.19와 5.16 등 격동의 정세 변화로 인해 지지부진 했지만,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 일대가 한국 동계 스포츠의 메카로 자리잡는데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한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전통썰매에서부터 시작한 동계스포츠

    우리나라 동계 스포츠 활동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썰매로 시작된다.

    썰매에 관한 기록은 이익(李翼, 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設)에 일부가 나타난다.

    함경도 삼갑(삼수갑산)에서 겨울에는 썰매를 타고 곰과 호랑이를 찔러 잡는다는 부분과 썰매를 타고 노량에 이르다. 썰매는 나무로 만들었고 평상과 같음. 아래는 배와 같다. 사람이 그 위에 타고 이를 끌면서 얼음 위를 가는데 매우 빠르다. 은성 풍속에서는 이것을 썰매라고 한다라는 부분에서, 다양한 겨울 활동을 했음을 짐작케 한다.

    1895년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출판된 한국의 놀이(KOREA GAMES)’에도 셜미 탄 사양군(썰매 탄 사냥꾼)’이란 기록이 있다.

    근대로 와서는 1912년 일본 고젠사단의 유가와 중위가 함경남도 국경지방에서 고대로부터 전해 온 스키 2대를 가지고 일본으로 갔으며, 이 스키는 조선 고대의 썰매(雪馬)라 부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1934년 당시 조선스키연맹 기술이사였던 일본인 이야마다로우 씨가 스키장 답사도중 함경남도 부전고원 연화산 서어수리 부근 화전민 마을에서 썰매를 발견해 촬영한 것도 남아 있다.

    1949년 대한스키협회에서는 대회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당시 협회 임원으로 있던 김정태, 백남홍, 정규홍 등에게 대관령을 답사토록 했다. 그때 이들은 처음으로 썰매를 보고 매우 신기하고 놀라워했다는 기록이 있다.

    1992년 강원도 알프스 스키장에서 열린 한·일 지도자 세미나 개회식에서는 한국 대표들이 한국썰매 기술을 복원-시연해 보임으로써 이 대회에 참석한 스키 지도자들에게 스키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95년 일본 나가노 현 노자와 에서 개최된 제15회 국제 스키 지도자 대회에서도 한국은 썷매 기술 시연을 했다. 사실 이 대회에 참가하기까지는 당시 대한스키협회 임원들의 스키 역사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김우연 부회장의 협조로 한국 썰매 기술 시연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협회에서는 시범단 단장으로 김하윤 부회장이 참가했으며, 임경순 감독, 윤항구 코치를 비롯해, 단국대학교 체육대학 재학생들로 구성된 한국썰매 시범단으로 김태경, 박남훈, 정찬성, 유제학, 김영관, 김원석, 오재혁, 오광택 등과 홍보에 강찬용, 통역에 곽강순이 참가했다.

    고대로부터 전해 온 우리민족의 전통썰매 기술과 형태는 세계 37개국 지도자들의 큰 관심을 모았고, 일본 언론에서는 연일 이를 소개하기도 했다.

    일본인 통해 국내 스키경기 시작돼

    조선에 철도직원으로 있던 일본인들은 대부분 나가노 현 출신들로 일본에서 스키를 타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상당수 많았다.

    그들은 한국에서도 스키를 탈 수 있다고 생각해, 1923년 외금강 온정리에서 스키를 처음 탔다는 기록이 있다.

    그후 1926년 함경남도 원산 신풍리에 스키장이 건설됐고, 1929년 해발 1,000m정도의 삼방 고원 목장지대에 크로스컨트리 18km코스와 2,500m의 활강 코스도 잇따라 건설됐다. 1931년 함경북도 성진에도 2개의 스키장이 생겼다.

    1930년대는 온정리 스키구락부가 탄생된 때이다. 1930년에 발족한 조선스키 구락부 이사로는 이길용 씨, 조선스키연맹 고문으로는 김시권 씨가 활약했다.

    1930년 원산삼방 스키대회에서는 140여명의 스키선수 중 10여명의 조선학생이 참가했으며, 1933년 명천스키장에서는 일본인 강사를 초빙해 처음으로 스키강습회를 개최했다.

    청학스키장은 성진 구락부에 의해 개발됐으며, 점프대도 있었다. 이곳은 1935년에 새로운 스키장이 건설됐고, 일본인들이 처음으로 이 땅에서 스키를 탔던 온정리 스키장은 1931년에 만들어 졌다.

    또한 1933년에는 함경북도 명천스키장과 함경남도 왕장스키장이 건설됐다. 1934년에는 퇴조스키장이 함경남도 철도와 홍남 질소비료공장 직원들에 의해 개발됐다. 1937년 평안북도의 유일한 동룡스키장은 철도국 직원들에 의해 개발됐다.

    함경도 나남스키장은 1940년 군부대에서 개발했는데, 여기에는 점프 연습대도 갖춰져 있었다. 1934년에는 전 일본스키연맹 산하단체로 조선스키연맹이 발족되어 그 해 70여명의 선수가 참가하는 조선스키대회를 삼방스키장에서 개최했다. 여자선수는 몇 명에 불과했지만, 이 대회는 명치신궁 체육 동계대회, 조선예선대회도 겸하게 됐다. 점프대회는 참가선수가 없어 오오와다선수가 시범을 보여주는데 그쳤다.

    그 후 삼민웅(森敏雄)씨가 조선철도국에 부임하면서 최훈 선수와 원산중·원산상고에서 각각 2명씩을 포함한 한국인 5명으로 점프선수단을 최초로 구성했다. 그 후 점프선수가 증가됐으나 19458.15 해방으로 삼방스키장은 주민들에 의해 철거됐다.

    조선신문 김정래 기자는 1935년 삼방스키장에서 개최된 전 조선스키선수권대회, 전 일본스키선수권대회, 조선예선대회, 명치신궁체육대회(明治神宮體育大會), 동계스키대회에 한국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취재기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1930년 제1회 조선스키대회는 조선스키클럽과 용산철도국 스키구락부와의 공동주최로 개최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영순과 오병희 선수가 참가하여 각각 3위와 5위에 입상했다.

    1935년에는 한국등산인들로 구성된 백령회가 스키·등산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백령회의 엄홍섭 회장은 일본스키연맹의 협조를 얻어 주형렬, 박순만, 김정태, 박봉덕 등의 지도자 연수교육을 실시했다. 이때 김정태 씨는 2급 자격증을 받고 귀국해 스키지도법과 실기를 보급했다. 19458.15해방이 됐으나 곧 38선이 가로막혀 스키인 들은 남북으로 흩어지게 됐다.

    해방만큼 험난한 우리나라 스키역사

    19458.15 해방의 기쁨도 잠시, 민족을 가로막는 38선으로 인해 남한의 스키동호인들은 1946년 서울대 문리대 강의실에서 조선스키협회를 창립하고 임원을 선출하면서 초대회장으로 권영대 서울대 교수를 선임했다.

    1947년 전남 지리산 노고단에서는 제1회 전국스키선수권 대회 겸 전국체전 동계대회가 동시에 개최됐다. 이때 70여명의 선수가 참가했으나 스키 수준이 낮아 강습회를 개최해 일반기술과 경기기술을 지도한 후에 대회를 개최하게 됐다.

    임원과 선수들은 기독교 선교회 산장에서 어렵게 생활하면서 대회를 마쳤다. 이때 엄익환 선수는 크로스컨트리 경기와 알파인 경기종목에서 우승했다.

    2회 대회는 울릉도에서 개최됐고 제3회 대회는 서울 광진성 동북산(현재 워커힐 뒷산)에서 개최됐다. 조선스키협회는 정부수립과 함께 대한스키협회로 명칭이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어렵게 3회 대회를 마친 협회는 1949년에 백남홍, 김정태, 정규홍 등을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에 파견해 적설량을 조사하게 했다.

    조사단은 이곳이 스키장으로서 손색이 없다는 결론을 협회 이사회에 제출했고, 이에 횡계리 주변 새봉령, 선자령, 골포기산, 달판재, 지르메산 제3 슬로프에서 경기가 진행됐다.

    4회 대회는 19502대관령 스키장에서 개최됐다. 그러나 6.25의 발발로 스키인 들도 피난길을 떠났으나 상동광산 지역 태백산에서 대회를 개최하는 등의 열성을 보인 스키인들도 있었다.

    1957년 제21FIS 총회에서 한국은 국제스키연맹의 정회원국으로 가입했다. 1960년 미국 스쿼베리 동계올림픽에 신업재 감독, 김용구 코치, 임경순, 김하윤 선수가 스키종목에서 대한민국 이름으로 처음으로 출전했다.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의 주도로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스키장 개설을 추진한 것이 스키종목 동계올림픽 첫 참가의 동력이 된 것이다.

    1960년 첫 동계 올림픽 출전을 시작으로, 우리나라는 1964년 오스트리아 인스브룩 동계올림픽과 1968년 그레노블 동계올림픽에 계속 참가하면서 한국스키 수준이 점차 향상됐으나, 1972년 삿뽀로 동계올림픽과 1976년 오스트리아 인스브룩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해 세계와 우리의 기술 격차가 다시 커지게 됐다.

    그러나 1980년 미국 레이크플레시드 대회부터는 다시 스키종목에서 올림픽에 참가하게 됐으며, 이때부터 선수들의 경기력도 점차 향상됐다.

     

  • ▲ 현재 스키는 우리나라의 겨울철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잡았다.ⓒ용평리조트
    ▲ 현재 스키는 우리나라의 겨울철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잡았다.ⓒ용평리조트

    1970년대 현대적시설 스키장 들어서

    현대적 리프트 시설을 갖춘 스키장이 등장한 것은 70년대다. 1975년 대관령에 용평스키장이 건설되면서 일반 스키 인구 증가는 물론 경기기술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스키인구의 급속한 증가로 스키장 개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서울 근교에는 양지리조트, 천마산, 베어스타운 스키장이 건설되고, 강원도의 진부령, 알프스 스키장도 현대적인 시설로 개발됐다. 뿐만 아니라 덕유산에 무주리조트가 건설되면서 남쪽 지방의 스키 인구 증가에 크게 기여했고, 국제스키연맹으로부터 공인코스로 인정받아 국제대회를 유치하기 시작했다. 그 후 서울리조트, 성우, 보광, 지산 스키장이 차례로 개발됐다.

    용평스키장에선 용평컵 국제대회가 매년 개최되고 있으며, 1998FIS 알파인 월드컵 대회와 1999년에는 제4회 동계 아시아 대회를 유치했다. 알프스 스키장에선 아시아 주니어 대회를 1992, 1995, 19973회를 개최했다. 또 무주리조트는 국제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유치하여 우리나라 동계 스포츠의 활성화에 큰 기여를 했다.

    스키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크로스 컨트리 경기장은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 삼현동에 15의 국제적인 코스로 1994년에 건설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