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아주지 않는, 평창 올림픽의 1등 공신은 김석원(金錫元)씨!

    김진선 전 강원도 지사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의 공(功)이 많지만, 이 모든 이들의 功을 합쳐도 이 한 사람의 개척정신이 없었더라면 평창 겨울 올림픽은 불가능하였다.

    趙甲濟


  • ▲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
    ▲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

    2018년 겨울 올림픽 개최지로 강원도 평창이 결정되었다. 평창이라기보다는 龍坪(용평)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김진선 전 강원도 지사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의 功이 많지만 이 모든 이들의 功을 합쳐도 이 한 사람의 개척정신이 없었더라면 평창 겨울 올림픽은 불가능하였다. 그의 이름은 金錫元(1945년생) 전 쌍용그룹 회장이다.
     
     그가 용평에 스키장을 중심으로 한 세계적 리조트를 만들었고, 그가 올림픽 개최 가능성을 가장 먼저 확신한 사람이며, 그가 스키인구 4000명을 600만 명으로 키운 제1공로자이다. 김석원(金錫元)씨가 2003년 용평을 다른 회사로 넘길 때까지 확보한 용평 리조트 부지는 약520만 평이고, 그 가운데 120만 평이 개발되었다. 7년 뒤 평창 올림픽은 그가 40년 전에 개척한 땅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될 것이다.
     
     한국 보이스카웃 총재를 지내면서 1991년 8월 세계 잼버리 대회를 강원도 고성에서 개최한 적도 있는 金 전 회장은 만능 스포츠 맨이다. 그는 지리감(地理感)이 선천적으로 좋다고 한다. 아버지의 자가용 운전사가 모르는 길을 갈 때는 소년 김석원을 옆자리에 앉혀 길잡이로 삼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지도를 입체적으로 본다. 김석원이 용평을 미래의 겨울 올림픽 경기장으로 발견한 때는 1971년 2월 초였다. 만26세이던 김씨는 해병대에 자원입대, 사병으로 근무하다가 월남전선 파견 명령을 받고 휴가를 얻었다. 이때 혼자서 찾아간 곳이 평창군 횡계리 '대관령 산장'이었다.
     
     산장 관리인에게 "여기 스키장이 있다는데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관리인은 턱짓을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스키장이요? 아 저기 보이는 게 다 스키장이지요. 언덕배기에 눈이 쌓이면 그게 다 스키장 아닙니까?"
     
     그는 특유의 지리감으로 "여기는 될 곳이다"는 확신을 가졌다. 金씨는 월남에 가서 수색대 파견 뒤 의무병으로 근무하다가 귀국, 1972년 8월에 제대하였다. 아버지 김성곤(金成坤)씨는 쌍용양회 등 여러 기업을 일으킨 사람이자 여당인 공화당의 실력자였으나 1971년 10월의 黨內(당내) 항명(抗命)파동의 주역(主役)으로 나섰다가 장기집권을 결심하고 있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 의하여 공직(公職)에서 추방된 뒤 조심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김석원씨는 1972년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진부령, 대관령 지역을 답사하였다. 지프에 트레일러를 달고 스노모빌을 실었다. 눈밭을 달리는 1인승 스노모빌을 처음 본 사람들에겐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는 대규모 스키장의 4대(大) 조건을 물, 도로, 전기, 그리고 휴전선으로부터의 거리로 잡았다. 이 기준으로 평가하니 진부령보다는 대관령 지역이 유리하였다.

     

  • ▲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이 일군 용평스키장 전경. 현재까지 이 곳은 동계 레저스포츠의 중심지로 자리잡고 있다.
    ▲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이 일군 용평스키장 전경. 현재까지 이 곳은 동계 레저스포츠의 중심지로 자리잡고 있다.


    김씨는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한 편이다. 일본의 스키장 전문 조사기관 세 곳과 프랑스의 한 회사에 용역을 주었다. 이렇게 하여 확정된 곳이 해발 1,400미터가 넘는 발왕산 기슭을 중심으로 한 지금의 용평 일대이다. 슬로프를 3,500미터까지 낼 수 있다고 계산하였다(현재 레인보우 파라다이스 코스는 5,600미터). 그가 용평 리조트의 모체(母體)인 고원(高原)개발을 창립한 것은 1973년 3월. 아버지 김성곤 회장으로부터 자본금 2억원을 빌렸다. 김석원(金錫元)은 초등학교를 일본에서 다녔다. 일본의 사정에 밝았다. 당시 일본의 스키인구는 약1,000만 명이었다. 김석원(金錫元)은, 한국도 소득 향상으로 스키인구가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고원(高原)개발이 38년 전 차관으로 도입한 스키장 설비들 이름들, 즉 리프트, 제설기(製雪機), 정설차(整雪車), 설상차(雪上車=스노 모빌)은 이제 한국인들의 귀에 익은 게 되었지만, 당시는 담당 공무원들에게 가르치면서 인허가를 받아야 했다. 우리나라엔 리프트에 관한 법규가 없었다. 케이블카에 적용하는 삭도법(索道法)이 있을 뿐이었다.
     
     공무원이 "도대체 리프트가 뭡니까?"라고 물었다. 김석원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쇠로 만든 굵은 철사줄이 일정한 간격의 거리를 타원형으로 빙빙 돌아가면 거기에 매달린 의자에 스키어를 한 사람씩 앉혀서 슬로프 꼭대기로 실어 나르는 시설입니다."
     
     김석원씨는 일본의 관련법을 연구하여 공무원들에게 가르쳐주어야 했다. 그리하여 기존의 삭도법을 개정, 리프트를 포함시키게 되었다. 김씨는 "무조건 안 된다며 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보자며 같이 고민하던 그 시절의 공무원들이 그리워진다"고 회고한 적도 있다.
     
     지금은 리프트가 스테이션 안으로 들어오면 서행(徐行)함으로 내리고 타기가 쉽다. 당시엔 리프트의 속도가 같아 타고 내리는 데 묘기를 발휘하여야 했다. 70년대 말에 개발된 서행(徐行) 기술은 '디테처블'(detachable: 분리 이탈)이라고 하는데 이 설치 허가를 받는 데도 애를 먹었다. 서행기술은 법규에서 규정한 리프트 속도보다 늦기 때문에 허가를 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석원씨측은 여기서도 좋은 공무원을 만났다. 평창군청의 담당계장은 派獨(파독) 광부출신의 애국자였다. 대구 팔공산 케이블카가 디태처블 방식을 채용한 것을 확인하고 허가를 내주었다.
     
     당시 제설기(製雪機)는 영하 5도 이하에서만 작동할 수 있었다. 1979년 겨울 시즌 개막날에 맞추어 슬로프를 따라서 발왕산 꼭대기로 제설기(製雪機)를 돌리면서 올라갔는데 10미터를 남겨두고 기온이 상승, 눈을 만들 수 없게 되었다. 김석원씨는 고민하다가 묘안을 냈다.
     "가마니를 깔아라!"였다.
     
     평창이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될 수 있었던 요인중엔 골프장, 스키장, 콘도미니엄 등 시설들이 세계적 수준의 친(親)환경 미관(美觀)을 가진 점이 포함될 것이다. 이 또한 김석원씨의 집념과 안목에 감사해야 할 일이다.
     
     평창 올림픽이 확정된 이후 언론은 득표 활동을 잘한 이들을 주로 영웅으로 만들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스키 슬로프는 일본인이 만든 금강산 부근 원산 신풍리였다. 분단(分斷) 으로 북한지역의 스키장을 빼앗기고 남한지역에서 슬로프를 찾아 헤매던 스키어들이, 발왕산에서 슬로프를 찾아낸 것은 1956년, 김석원씨가 이곳에 스키장을 짓기로 결심한 것은 그 17년 뒤, 여기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리는 건 그로부터 다시 45년 뒤이다. 모든 좋은 것엔 개척자의 꿈과 집념과 시간이 들어간다. 飮水思源(음수사원), 오늘밤의 기쁨을 마시는 한국인들은 샘물을 판 사람이 누구인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