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민족운동의 리더이자 화교와의 가교 역할로 임정 지원
  • 일제 강점기 미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는 숱하게 많다. 그 중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교민사회를 이끌어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분도 있다. 바로 홍언 선생이다.

    국가보훈처는 미주 한인합성신보, 신한민보의 주필 및 흥사단에서 활동하고,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으로 교민사회의 지도적 역할을 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던 홍언 선생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 홍언 선생은 일제강점기 미주한인사회의 민족운동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선생이 사망한 뒤, 미주사회에서는 선생을 ‘고결하고 참된 애국자이며, 평생을 우리의 문화향상과 사회와 국가에 대한 모든 것을 솔직하게 비판한 작가ㆍ시인ㆍ평론가’로 평가했다. 어떤 평가에서는 ‘자신의 모든 사생활을 희생한 인물’로 말하고 있다. 

    홍언 선생의 본명은 홍종표다. 서울에서 태어나 한학을 수학하고 중국을 다녀온 뒤, 1904년 하와이로 이민하였다. 1910년 전까지 하와이에서 여러 언론매체의 주필로, 그리고 1911년 이후에는 미주 본토에서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인 <신한민보>의 편집과 기고가로 봉사하였다. 또한 선생은 <신한민보>에 ‘동해수부’ 등의 필명으로 시ㆍ시조ㆍ소설ㆍ희곡ㆍ전기ㆍ수필 등 다양한 장르에서 수백 편을 발표하는 등 언론인이자 작가로 활동하였다.

    선생은 대한인 국민회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직임을 맡았으며, 흥사단의 창립멤버로 흥사단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미주한인사회에서 문필로 선생만큼 공헌한 인물을 찾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화교들과 교류하며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는데도 기여했다. 여러 차례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와 페루 등을 순방하여 화교들에게 한국독립운동 지원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화교들과의 친분은 재정지원 이외에도 한중연대에 징검다리 역할을 하여 만보산 사건 당시 그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선생은 무엇보다도 미주 한인단체인 대한인 국민회 역사의 정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비록 완성되지는 못하였지만, 선생은 1944년부터 1년 간 <신한민보>에 ‘국민회약사(略史)’를 50여회 연재하였으며, 1949년에도 다시 연재를 시도했다. 선생은 1951년 별세 후 로스앤젤레스 로즈데일 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홍언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