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교수-대학생들 역사대담> 건국과 이승만 정권에 대한 평가해방전후史는 분단 아닌 자유민주주의 건설 과정"
  • <바이트 역사대담>-대한민국 역사상식에 도전하다
    이영훈 교수 >건국과 이승만 정권에 대한 평가< 대학생들

    "해방전후史는 분단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건설 발전 과정"

    『대한민국 이야기』의 저자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민족 중심의 역사교육을 비판하며 ‘자유’와 ‘개인’이라는 문명의 요소로 20세기 역사를 재해석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바이트는 이 교수와 대학생들의 대담을 통해 역사인식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대담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이 교수의 역사인식은 서구적 개념으로 한국사를 재단한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며 ‘민족’ 단위 역사 서술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대담을 펼친다.

    ‘건국과 이승만정권에 대한 평가’를 주제로 펼쳐진 대담에서 이영훈 교수는 민족의 분단이 아닌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발전시켜온 역사로 해방전후사를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독재와 함께 당시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못한 시대적 제약도 함께 살펴봐야 한다며, 건국과정에서의 이 전 대통령의 모든 공이 사장돼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김승재= 1948년 정부수립 이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1949년 1월부터 활동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극히 적은 숫자만이 처벌을 받는데요. 그것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석방되고 맙니다. 어떻게 보면 꼭 처벌받아야 했을 사람들이 처벌받지 않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까지 친일파를 처벌해야 한다는 정서가 남아 있는 것은 어쩌면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하려는 세력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당시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다는 국민들의 정서가 계속 이어져 온 것은 아닌지 생각되는데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너나 나나 똑같은데 누가 누구를 심판하느냐"

    ◆“역사적 제약과 환경을 초월하는 어떤 개인의 영웅적인 선택이 있어서 친일파를 처단할 때도 과감하고 단호하게 이뤄졌어야 했다는 그런 이야기죠. 그런데 수만 명의 광복군이 국경을 넘어 들어와서 일제를 몰아내는 식으로 해방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참 민족의 영웅 서사가 펼쳐지기를 기대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에요. 해방이후에 개인자격으로 임시정부를 따라온 광복군의 수는 불과 300명도 안 되었고, 그들은 비무장한 상태에서 도착하자마자 전부 흩어져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해방은 일본과 미국의 전쟁 결과 일본의 제국주의가 해체됨으로써 이뤄진 것이
    고 대한민국의 성립은 크게 보면 미국의 전후처리 과정에서 생겨난 국가입니다. 이런 큰 역사적 제약 속에서 친일파를 엄단할 특별한 권위를 갖는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처벌할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데 그런 일은 이뤄질 수 없는 것이죠.
    대한민국이 만들어지고 헌법에 의해서 반민족특위가 구성돼 처벌하려고 하니까 처벌받는 당사자들이 반발하지 않습니까. “너나 나나 똑같은 사람인데, 누가 누구를 재판하느냐.” 이런 얘기가 수사 받는 과정에서도 나오고 재판정에서도 나왔습니다. 재판을 한다고 재판관에 앉아 있는 사람이나 재판을 받는 사람이나 다 똑같은 입장인 것이죠.
    그런 상황에서 오늘날 후손들이 기대하는 광범위하고 과감한 친일파 청산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현실
    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오늘날 그것을 다 용서하고 묵인하자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왜 그렇게 밖에 될 수 없었는지 역사의 모순을 이해하자는 것이죠.
    제주도에서는 아직도 반란이 진행 중이고, 휴전선에서는 끊임없이 무력충돌이 일어나고 있어 누구나 조만간 대규모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악질 친일파 제외하고 건국에 동참하자"는 말은 옳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상황에서는 민족의 분열을 피하도록 극단적인 조사는 피해줬으면 좋겠다고 몇 차례 공개적으로 언급합니다. 나라만들기 과정에서 모두가 단결해서 공산주의와 싸워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드는 것이 최고의 정치적 아젠다로 제기돼 있는 상황에서 친일파 청산은 제약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립운동가를 체포·구금·고문한 악질적인 소수의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건국 과정에서 동참하지 못할 친일파는 없다고 얘기한 이승만 대통령의 이야기가 저는 결국 옳다고 생각합니다.”

    ▶황인혜= 저는 건국 전에 있었던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여운형과 김규식 선생을 중시면서 ‘운동’이 아니라 ‘좌우합작시도’정도가 적절하다고 평가하셨는데요, 그에 대해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공산주의 국가냐' '자유민주 국가냐' 대결...소련이 분단 원흉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 미소공동위원회가 설치되고 미국·영국·소련·중국의 신탁통치안이 결정됩니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 없이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
    자 미군정은 온건한 중간파 세력으로 김규식, 여운형 등이 중심이 된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 이승만이나 박헌영처럼 대중동원 능력이 없었습니다.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미군정의 지원만으로 좌우합작운동이 성공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가운데 1947년 동서냉전이 본격화되면서 미국이 공산주의 국제세력을 봉쇄하는 방향으로 한반도 정책을 바꾸자 좌우합작운동도 추진력을 잃고 맙니다.
    당시 소련 점령 하에 있던 동유럽에서 좌우합작에 의한 임시정부가 많이 성립되지만 사회주의 정부로 넘어가는 단계에 불과했는데, 그 상황을 이승만은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구한말 나라가 망하는 것을 현장에서 피눈물로 체험한 이승만은 러시아(소련)가 어떤 나라인지 익히 잘 알고 있었죠. 또 기독교인으로서 공산주의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는 정신세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
    로 그는 소련과의 협조 노선은 어떤 형태로든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승만 같은 명망가가 강력한 반공노선을 들고 신탁통치를 반대하자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동참합니다. 특히 북한에서 공산주의 체제를 피해서 남하해온 100만 명에 가까운 월남 동포들이 강력한 지지 세력을 형성합니다.
    분단은 결국은 ‘공산주의로 나라를 세울 것이냐’ ‘자유민주주의로 나라를 세울 것이냐’ 하는 건국이념의 문제였습니다."

    ▶이승수= 저는 우리가 분단의 책임을 묻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승만도 김일성도 절
    대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민족보다 이념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각
    자의 이념에 따라 나라를 세운 것인데, 어느 한쪽에 분단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인지요?

    소련, 비밀 지령...46년초부터 북한 인민위는 단독정부로 통치

    ◆“단일한 역사공동체였던 남북한의 분단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언젠가는 합쳐야 한다’는 당위론적 명분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데, 이때 반드시 나오는 문제가 ‘역사적 정통성이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역사교육 현장에서 이승만과 대한민국에 분단의 책임을 묻는 비판이 많이 제기돼 왔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객관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은 북한의 소련군정에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독자의 정부를 북한에 세우라는 비밀지령을 내립니다. 이는 소련이 해체되면서 공개된 비밀문서에 나온 내용인데요, 그와 같은 지령이 내려진 배경에는 전후세계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소련과 미국의 다툼이 있었습니다. 스탈린의 비밀지령이 내려오자 북한에서는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성립되고 이 위원회의 이름으로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이 단행됩니다. 이때부터 북한에 서는 사실상 정부에 준하는 통치행위가 전개됩니다.”

    ▶김초롱= 북한에서는 무상몰수·무상분배, 남한에서는 유상몰수·유상분배의 토지개혁이 진행됐습니다. 이에
    대해 평가해 주셨으면 합니다.

    북한 토지개혁은 국유화, 이승만은 '대한민국 국민 만들기' 개혁

    ◆“북한이 실시한 토지분배는 소유권의 분배가 아니라 경작권의 분배였습니다. 무상몰수·무상분배를 하게 되면 현실적으로 경작지는 생기지만 토지에 대한 처분권은 농민들이 가질 수 없어요. 결국은 국가가 토지를 소유한 최고 지주가 되고 농민은 국가의 토지를 경작하는 일종의 소작농적인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남한의 토지개혁은 경작 가능한 범위를 초과하는 토지에 한에서 국가가 유상으로 수용하고 농민들이 유상으로
    분할상환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는 현실의 토지경작체제를 그대로 온존시켜 생산력을 파괴하는 부작용은 막고, 농민들은 자작농지를 확보하게 됨으로써, 생산의욕이 높아졌습니다. 남한의 토지개혁은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완만하면서도 장기적으로 농업혁명을 유발시킨 하나의 개혁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농민들을 자작농지의 소유자로 만듦으로써 대한민국 국민을 창출한 근대적 개혁이었습니다.”

    ▶김형주= 건국과정에서 보여준 정치적 행동은 이해되는 부분도 있으나, 건국 이후에 보여준 ‘부산정치파동’이나 ‘사사오입’ 같은 장기 집권을 위한 이 전 대통령의 행동은 분명 지탄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이승만 제거 시도...이승만, 직선제 개헌으로 바꿔 난세 돌파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를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독재가 후진국형 독재처럼 대통령 일족들의 권력과 부를 늘리는 독재는 아니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독립운동 당시부터 ‘나라가 세워지면 적어도 10년간은 민주주의 를 국민들에게 교육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 왔었고, 자기 밖에는 그럴만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6·25전쟁 초기 서울이 3일 만에 함락당하는 등 큰 실책으로 이승만은 탄핵 위기에 놓입니다. 게다가 미국은 북
    진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을 굉장히 부담스러워했고, 차제에 이승만을 제거할 계획을 세웁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승만은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고 무리하게 집권을 계속 연장해 갔습니다. 이를 계기로 국회의 견제를 벗어난 독재정치가 시작됐고, 민주주의 원칙이 훼손됐죠. 이에 대해서는 이승만의 책임이 큽니다.
    그러나 저는 당시 한국정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쟁, 미국과의 동맹, 통일 그리고 경제건설이라는 나라 만들기의 큰 과제가 놓인 상황에서 한국의 정치수준은 그 큰 과제를 풀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주장을 내세우더라도 타협하고 건설적인 방안을 모색할 수 있는 정치적 신뢰관계가 형성돼 있지 못했죠. 정당정치도 성립하지 않았고, 이슈에 따라 이합집산이 왕성
    하게 이뤄지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상적인 민주주의의 논리에 입각한 정치게임이 벌어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 시대를 미화할 필요는 없지만 시대적 제약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승수= 교수님의 책에서 해방과 대한민국의 건국을 문명사의 대전환으로 평가하셨던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또 1950년대에 대한 평가도 흥미로웠는데요.

    전쟁후 폐허에서 문명사적 대전환 이루다

    ◆“해방전후의 역사를 분단의 역사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저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발전시켜온 건국사의 관점에서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48년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이 국민주권의 민주주의를 선포함으로써 자유, 인권, 국민주권, 사유재산, 시장경제 등 근대문명이 삶의 원리가 되는 문명사적 전환을 맞게 됐습니다. 또 1950년대는 6·25전쟁이후에 6년이라는 짧은 기간 굉장히 중요한 성취가 있었습니다. 우선 ‘교육혁명’이라고 부를 만큼 교육에 대한 국민적 수요가 폭발하면서 이 시기 60년대 이후의 고도성장을 가능케 했던 우수한 ‘사회적 능력’이 축적됩니다.
    또 면방직, 제분, 설탕을 비롯한 소비재공업뿐만 아니라 비료, 시멘트, 철강업등 기초적 공업재료 분야에 이르기까지 일정 수준의 공업시설이 건설됐습니다. 60년대가 되면 이 시기 건설된 공업
    들이 수출산업이 됩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은 이런 토대 위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50년대 하면 혼란과 갈등, 분열만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건설현장에서 나라 만들기에 헌신했습니다. 그러한 총체적인 기획과 지평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정치적 비극 때문에 다 사장돼 왔는데, 지금이라도 올바르게 재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리·이유미 발행인 worldeyu@naver.com
    ♣이영훈 교수 약력
    現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現 사단법인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
    주요 저서
    《조선후기사회경제사》(한길사, 1988)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연구》(공저, 민음사, 1997)
    《맛질의 농민들》(공저, 일조각, 2001)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서울대학교출판부, 2005)
    《대한민국 이야기》(기파랑, 2007)

    ★대담 참가 대학생
    김승재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3학년
    김초롱 경희대 언론정보학과 4학년
    김형주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이승수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황인혜 동국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