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장교 4명 北에 피랍?" 보도,정말 北에 피랍됐을까? 99년 국정원 대학살과는?
  • ‘지난 99년 北이 한국군 장교 4명을  납치, 작계 5027 등 군사기밀을 빼갔다’는 20일자 <YTN>보도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군은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다”며 부정하고 있다. 당시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

    “99년 北은 이미 작계 5027을 입수했다”는 ‘흑금성’

    20일 <YTN>은 “작계 5027 유출 혐의로 기소된 ‘흑금성’ 박채서 씨의 2심 재판에서 ‘99년 당시 중국에서 한국군 중령 1명과 대령 3명이 北에 체포됐다’는 주장이 나왔다”고 보도했다. <YTN>은 이 보도에서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전직 북한전문기자 정 모 씨가 ‘합동참모본부 정 모 중령이 1999년 중국 국경에서 납치되고, 박 모 대령과 이 모 대령이 북한으로 납치·체포된 사실을 아느냐’는 변호인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 현재 2심 재판 중인 '흑금성' 박채서 씨.
    ▲ 현재 2심 재판 중인 '흑금성' 박채서 씨.

    다른 언론들도 정 씨가 “北이 우리 장교들을 납치하고, 그 사람들을 통해 작계 5027을 입수했으며, 2004년 北이 관련 사실을 공개한 것을 아느냐”는 질문에 “그렇다. 당시 이 내용을 상부에 보고했으나 문제가 커질 것 같아 그냥 덮었다”고 답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정 씨는 다른 언론과의 통화에서는 이같은 <YTN>과 일부 언론의 초기보도와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정 씨는 다른 언론에게는 “내가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다. 그런 소문이 있어 취재를 하다 그만뒀다”고 밝혔다. 정씨는 “변호인이 남북 경제협력과 관련해 질문할 게 있다고 요청해 증인으로 나갔을 뿐”이라고 했다.

    이 같은 내용에 언론마저 헷갈리고 있다. 이 내용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남북한이 중국에서 벌였던 첩보전과 한국 내 국정원 내부 형편 및 정치 상황을 살필 필요가 있다.  

    1999년 중국 내 대북정보망 붕괴 사건

    1990년대 후반 북한과 중국 국경 주변에서는 북한과 한국 간에 치열한 첩보전을 벌어지고 있었다. 한국은 국정원과 정보사령부 요원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당시 정보사 요원들은 영변 핵시설 주변에서 방사능에 오염된 흙을 채취해 북한의 핵개발 사실을 확인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침투했던 영관급 장교와 부사관은 무공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국정원 요원들도 북한 핵심세력을 탈북시키거나 평양의 고급 정보들을 입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실제 1997년 2월 황장엽 노동당 비서가 한국으로 왔고, 같은 해 8월에는 이집트 주재 북한 대사인 장승길 씨가 미국으로 망명했다. 1998년 2월에는 국제식량기구 북한 대표부 김동수 씨가 한국으로 왔다. 1999년 1월에는 독일 주재 이익대표부 김경필 서기관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 같은 일이 계속 벌어지자 발끈한 김정일은 1999년 4월 연평해전을 일으키는 한편, 중국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보위부의 반탐(대간첩 작전) 요원들을 중국으로 보내 한국 요원들을 제거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이대로 뒀다간 큰 일 나겠다’고 생각한 중국은 대북정보망의 핵심 거점이던 선양의 K 항공 지점(당시 부지점장이 국정원 요원이었다) 등을 급습해 한국 요원 30여 명과 이들에 맞서던 북한 보위부 반탐요원들을 함께 체포했다.

    중국 공안당국은 한국 요원들에게 “그동안의 활동 내역을 털어놓으면 보내주겠다”고 제안했고, 한국 정보당국은 요원들에게 자백하도록 지시했다. 결국 요원들은 모두 무사히 귀국했다. 이때 대북 정보망은 와해 직전까지 갔다.

    대북정보력 와해시켰던 1999년 국정원 대학살

    이 같은 일이 벌어지고 난 후 국정원 내부에서는 ‘중국이 어떻게 국정원의 활동을 그렇게 샅샅이 알고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제기됐다. 일부 요원들은 누가 배후에 있는지 짐작했다. 하지만 결국 아무도 그 ‘배후’를 말하지는 못했다. 그해 초부터 ‘국정원 대학살’로 불리는 숙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 2002년 5월 10일자 <시사저널> 보도. 이 '괴문건' 보도로 <시사저널>과 문건을 입수했던 <오마이뉴스> 기자 간에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 2002년 5월 10일자 <시사저널> 보도. 이 '괴문건' 보도로 <시사저널>과 문건을 입수했던 <오마이뉴스> 기자 간에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국정원은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간부 125명을 포함, 모두 581명의 대공전문요원들을 숙청했다. 당시 해직된 사람들의 모임인 ‘국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하 국사모)’ 송영인 회장은 “해직자들 자리에는 특채로 뽑은 ‘특정지역 인맥’들이 자리 잡았다”고 주장한다. ‘국정원 양심선언’으로 유명한 김기삼 씨는 “이때부터 사무실 내에서 서로 형님, 동생하고 부르며, 위계질서까지 무너졌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증언은 1999년 ‘대학살 사건’ 전후 상부에서 주목하던 젊고 유능한 정보요원들이 갑자기 대거 퇴직한 때 나왔던 말과도 일치한다. 이때 만난 요원들은 “계속 남아 있다가는 내가 이상해질 거 같아서 나왔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또한 대북정보라인이 점점 이상해진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한편 다른 쪽에서는 ‘노벨상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블루 카펫 프로젝트’로 알려진 이 ‘로비 공작’에는 당시 청와대와 국정원 핵심인사들이 연루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미국 뉴욕의 한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김기삼 씨는 2005년 전화통화에서 이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했다(이때 그가 지목한 몇몇 인사는 결국 비리혐의로 구속됐다). ‘블루카펫 프로젝트’에 대한 그의 이러한 주장은 2010년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는 책으로 나왔다.

    ‘흑금성’의 주장, 이중스파이의 ‘생존방식’인가 ‘사실’인가

    다시 현재로 돌아와 박채서 씨의 재판을 보자. 박 씨는 ‘흑금성’이라는 암호명으로 활동하던 정보사 소령 출신이다. 그는 당시 안기부의 지시에 따라 스스로 군 경력을 포기하며 전역한 뒤 ‘아자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회사를 통해 북한 보위부 고위층과 접촉하며 활동했다.

  • 1990년대 후반 박채서 씨가 공작활동을 위해 활용했던 '아자커뮤니케이션' 관련 보도.
    ▲ 1990년대 후반 박채서 씨가 공작활동을 위해 활용했던 '아자커뮤니케이션' 관련 보도.

    이때 안기부는 정부 내 남파간첩을 의식해 ‘백금성’이라는 가짜 스파이까지 만들어낸다. 하지만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권영해 안기부장 등이 주도한 ‘북풍 사건’이 터졌다. 결국 박 씨는 ‘북한은 김대중이 당선되지 않기를 원한다’는 ‘정보’만 믿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찾아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여당이 된 ‘새정치국민회의’는 그를 버린다.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박 씨는 2003년 북한 작전부(현 정찰총국) 요원의 부탁을 받고, 같은 해 9월부터 2005년 8월까지 ‘보병대대’ ‘작전근무령’ 등 9권의 군사 교범을 넘기고, ‘작계 5027’ 등을 알려줬다. 이 일로 2010년 체포됐다. 박 씨는 결국 국가보안법의 간첩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았다.

    이 같은 내용을 잘 아는 군 관계자들은 “박 씨(흑금성) 자신이 북한에 작계 5027를 건네준 게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 정 씨를 증인으로 내세운 것 같다”고 보고 있다. 실제 19일 재판에서 박 씨의 변호인은 정 씨를 내세워 “북한은 이미 작계 5027 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박씨에게 뒤늦게 자료를 넘겨받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작계 5027은 2년마다 조금씩 바뀐다. 박 씨 변호인 측 주장이 사실일 경우 北이 입수한 작계는 98년도 판(5027-98)이다. 반면 박 씨가 넘겨줬다는 작계는 그보다 6년 뒤인 2004년 판(5027-04)이다.  

    박 씨의 재판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 과정에서 나오는 그의 주장은 ‘충격적’인 게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우선 그의 활동과 주장 이면에 숨어 있는 것을 봐야 더욱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라도 ‘진실’이 알려지면 우리 사회에는 ‘연평도 포격’보다 ‘더 큰 충격’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