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10일(현지시간) 시위대의 즉각적인 하야 요구를 거부한 채 자신의 권력을 최측근인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에게 점진적으로 이양하겠다고 밝혔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이날 밤 국영TV로 생중계된 17분간의 대국민 연설에서 "나는 외부의 강권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며 대선이 치러지는 오는 9월까지 평화적인 권력이양 조치를 밟아나갈 것이라고 언급, 조기 사퇴를 하지 않겠다는 뜻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단호한 어조로 "헌법을 수호하고 국민의 이익을 지킬 나의 책임을 계속 결연하게 감당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또 자신은 이집트에 남겠으며,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대에 대해서는 "공화국의 대통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또 "나는 차기 대선에 나서지 않겠다는 내 의도를 분명히 밝힌다"며 종전의 불출마 약속을 재확인한 뒤 "헌법의 5개 조항은 개정하고, 1개 조항은 삭제할 것"이라며 종전의 개헌 약속을 구체화했다.

    그는 이어 발효된 지 30년 된 비상계엄령도 국가의 안보상황이 안정되면 해제하겠다고 밝혔으나 구체적인 계엄법 폐지 시점을 못박지는 않았다.

    이 같은 발표는 이날 밤 무바라크 대통령이 사임을 공식 발표할 것이라는 세간의 예측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또 무바라크의 조건없는 퇴진과 계엄법의 즉각적인 폐지 등 시위대의 핵심 요구와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30년 철권 통치자의 사임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카이로 타흐리르(해방) 광장에 모여든 시민들의 기대는 무바라크의 연설이 끝나기도 전에 분노로 돌변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연설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집트에서는 그가 사임을 발표할 수 있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감지됐고, 이런 탓에 타흐리르 광장에는 이날 저녁 무렵부터 수십만명이 운집해 그의 연설을 기다렸다.

    이와 관련, 이집트 군의 최고위원회는 이날 최고 사령관인 무바라크 대통령이 불참한 가운데 회의를 연 뒤 국영TV에 "국민의 적법한 요구"에 대한 지지입장을 발표해 무바라크 대통령이 군의 압력 속에 퇴임을 결심한 게 아니냐는 관측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무바라크 대통령은 오는 9월까지 권좌를 유지하겠다는 뜻을 재차 밝히자 타흐리르 광장의 시민들은 잠시 충격에 빠진듯 침묵을 지키다 이내 "떠나라, 떠나라, 떠나라" 등 구호를 연호하며 분노를 표출했다. 일부는 자기 이마를 치며 탄식했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연설이 끝나자 시민들은 "우리는 대통령궁으로 향한다, 수백만 명의 순교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발했으며, 시위대 약 1천명은 인근 국영방송 본부 건물로 몰려가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집트 민주화 시위를 이끌고 있는 주요 단체들은 11일 카이로 시내 6곳에서 각각 집회를 연 뒤 타흐리르 광장으로 행진하는 `100만명 항의 시위'를 열 예정이며 대통령궁으로의 행진도 계획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군부의 행동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집트의 유력한 야권 지도자인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이집트가 폭발할 것"이라며 "군은 지금 당장 국가를 구하라"고 촉구했다.

    또 시위대 대변인인 모하메드 무스타파는 "우리는 무바라크의 연설에 대한 군부의 강력한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또 개혁 성향의 판사인 히샴 바스타위시는 "대통령은 그의 정당성을 오래 전 상실했다"고 지적한 뒤 "공은 군대의 수중으로 넘어 갔다"며 "무장한 병력이 개입해야 하며, 너무 늦기 전에 그(무바라크)를 축출해야 한다"고 밝혔다.

    무바라크의 연설에 대해 군부는 현재까지 구체적인 입장을 내 놓지 않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무바라크 연설 후 발표한 성명을 통해 이집트 정부의 '변화'가 불충분하다며 더 구체적인 정권 이양 계획을 밝힐 것을 촉구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집트인들은 권력 이양이 있을 것으로 들었으나 (무바라크가 발표한) 이양이 즉각적이고 의미있게 이뤄질지, 혹은 충분할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이집트 정부가 민주화로의 진정한 이행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집트인 다수가 확신을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 뒤 "이집트 정부가 이집트 국민과 세계에 분명히 말할 책임이 있다"고 부연했다.

    또 "이집트 국민들의 보편적 권리는 필수적으로 존중돼야 한다"고 강조한 뒤 이집트 정부가 더 신뢰할만하고, 구체적이며, 분명한 민주화 계획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캐서린 애슈턴 유럽연합(EU) 외교ㆍ안보정책 고위대표는 무바라크의 완만한 개혁 행보를 비난하며 "지금이 바로 변화의 때"라고 말했다.

    한편 9월 대선때까지 정부 수반 역할을 위임받게된 술레이만 부통령은 무바라크 대통령의 연설이 끝난 뒤 타흐리르 광장에 모인 시민들에게 가정과 일터로 복귀할 것을 촉구했다.

    군 장성 출신인 술레이만 부통령은 1993년부터 막강한 권한을 가진 이집트 정보국 수장을 맡아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해오다 시위 사태 초반인 지난달 29일 부통령에 임명됐다.(카이로=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