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당시 서울대병원에서 국군 부상병 1000여명 학살첫 사단장 유경수는 김정일 이모부...각별한 관심 표시
  • 북한 김정일이 지난해 마지막 날인 31일 자신의 `선군혁명 영도'를 상징하는 탱크부대를 시찰하고 훈련 상황을 지켜봤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전했다.

  • ▲ 지난해 초 김 정일에게 남한 침공 시범 기동을 보이고 있는 북한 '근위 서울 류경수 105땅크 사단'의 PT-76 수륙 양용전차.ⓒ연합뉴스
    ▲ 지난해 초 김 정일에게 남한 침공 시범 기동을 보이고 있는 북한 '근위 서울 류경수 105땅크 사단'의 PT-76 수륙 양용전차.ⓒ연합뉴스

    김정일이 한해를 마감하며 찾아간 인민군 '근위서울류경수제105땅크사단'은 6.25전쟁 당시 서울에 처음 입성한 전차부대. 뒤에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인 류경수 사단장의 이름을 따 부대명이 붙여졌다.
    김정일은 지난해 정초에도 인민군 부대 가운데 처음으로 이 부대를 시찰했다.
    김정일이 이 탱크사단에 간 것은 이번까지 모두 27차례. 다른 부대에 비해 파격적인 관심과 기대를 보내는 있다.
    하지만 이 부대가 개전 나흘만인 6월 28일 부상당한 국군 1000여명을 잔인하게 집단학살한 부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6.25전쟁 당시 ‘105땅크여단’으로 불리던 이 부대의 지휘관은 유경수로 중국 연길 출생이다. 김일성이 빨치산 활동을 하던 1932년 17살의 나이로 가담했고 김일성보다 네 살 어렸다.
    개전 초기 유경수의 105전차 여단은 서울 점령의 선봉에 섰다.
    당시 서울을 점령했던 부대는 북한군 4사단과 3사단, 그리고 서울 점령 후 사단급으로 승격된 105땅크여단이었다.
    서울에 진입한 105땅크여단은 탱크를 앞세워 서울대병원에 진입, 입원해있던 항거불능의 국군 환자들 1000여명을 모두 학살해 버렸다.
    병실마다 찾아다니며 총을 난사했고 살겠다고 기어서 병실을 벗어나는 중상자들을 총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같은 국군 부상병 학살은 서울대병원에서 멈추지 않고 당시 서울의 대형 병원이던 세브란스병원과 적십자병원까지 이어졌다.

  • ▲ 6.25 당시 서울에 진입한 당시의 105 땅크여단.ⓒ자료사진
    ▲ 6.25 당시 서울에 진입한 당시의 105 땅크여단.ⓒ자료사진

    목격자들에 의하면 당시 서울대병원에는 사흘간의 서울 이북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실려 온 국군 부상환자로 만원 상태였다. 모두 후방으로 후송이 되어야 하는데 당시 군 지휘부는 후송 대신 경비 병력 1개 소대만을 파견했다.
    경비 소대는 탱크에 맞서 용감히 싸웠지만 한 시간도 안 되어 소대장을 포함해 거의 전사했다. 서울대 병원에 난입한 북한군들은 중좌의 지휘로 병동 출입구를 모두 봉쇄하고 병실마다 찾아다니며 총을 난사해서 국군 환자들을 학살했다. 국군 부상병과 구분이 안가는 일반 환자들도 같이 학살했다.
    환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죽이던 이들은 곧 더 생산적인 살인 방법을 동원했다. 침대마다 찾아다닌 대신 환자들을 입원실 구석에 몰아넣고 사살했다.  목격자들은 중상을 입고 움직이지 못하는 국군 장병 중에는 혀를 깨물고 자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약 세 시간 동안 광란의 살인극 뒤에 북한군은 병실과 건물을 다시 뒤져 아직도 생존한 국군들을 찾아내서 치과 대학 앞에 집합시키고 집중사격으로 전원을 학살했다.
    저항 능력이 없는 적군이나 포로를 무차별 학살한 전례없는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이 김정일이 27번이나 찾은 ‘105땅크사단’이라는 증언이다.

    한편 사단장인 유경수는 김정일의 이모부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의 여동생이 유경수의 부인이라는 것이다.
    야후의 ‘울프 독’이란 블로거는 “유경수가 보잘 것 없고 무모한 전술로 자신의 사단이 궤멸됐지만 김일성은 전혀 처벌하지 않았다”라며 “빨치산 출신에 인척이라는 점을 고려해 전쟁 중에 패장을 군단장으로 승격시키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는 “김정일이 이 부대를 자주 찾는 것도 죽은 생모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는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