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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북한의 연평도 기습도발 이후 정치권과 안보기관들은 서로 책임공방을 벌이느라 정신이 없다. 이를 보는 국민들은 분노한다. ‘책임전가 공방’이나 하는 자들은 쫓아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국가안보 책임기관? 그런 건 없다
우리나라는 역사적,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안보의 중요성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높다. 때문에 청와대를 정점으로 국정원, 군, 행정안전부 및 산하 기관들, 외교통상부, 통일부가 담당 부처가 되고 다른 모든 부처들이 이들을 지원하는 형태를 띤다. 이때 청와대는 5년마다 대통령이 바뀌기 때문에 담당부처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외교안보수석과 그 아래 비서관들은 이런 도움을 얻고 안보기관 간의 업무 중복으로 인한 비효율을 제거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하지만 이들 또한 실행기관이 아니기에 담당부처의 협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담당부처는 청와대와의 조율 없이는 다른 부처들과 불필요한 충돌이나 갈등이 일어날 소지가 많다. 아무리 좋은 계획을 세워도 청와대가 허락하지 않으면 예산도 인력도 확보할 수 없다. 따라서 청와대, 타 안보부처와의 꾸준한 의사소통을 통해 ‘큰 그림’에서의 역할분담을 해야 한다.
이렇게 청와대와 안보관련 부처들은 각자의 역할과 담당분야는 있을지언정 연평도 도발과 같은 일이 생겼을 때 모든 일을 책임지는 ‘주무부처’라는 건 없다. 대북정보를 수집해 평가하는 것, 연합정보자산을 받아 평가하는 것, G20 서울정상회의처럼 국가적 행사가 있을 때 보안문제에 대비하는 것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실상 안보기관은 모두 ‘한 팀’이 돼 움직이는 게 정상이다.
청와대-안보기관-정치권의 책임 공방
하지만 국민들이 목격한 '국가수뇌부'와 '안보부처'의 모습은 이런 ‘이론’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연평도 기습도발이 일어나자 정치권과 언론은 군의 안이함과 대응수준을 맹렬히 비난했다. 비난의 내용도 ‘해병대 뭐했나’하는 식의 ‘싸잡기 비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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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평도 기습도발 직후 정치권과 언론은 '해병대 뭐했냐'는 식으로 비난했다. 하지만 이 사진 한 장으로 비난의 화살은 군 수뇌부를 향했다.ⓒ
나중에 연평부대 해병들이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지 알려지자 이번에는 비난의 화살을 군 수뇌부로 돌렸다. ‘천안함 사태 이후 군 수뇌부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무사 안일하게 대응하다 일이 생겼다’, ‘햇볕정책을 중단해서 그렇게 됐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설익은 응급처방도 쏟아졌다. 정치권은 군에 ‘서해도서에 세계 최고의 무기를 배치하라’고 주문하는 한편 추가도발에 대응할 수 있는 전력배치계획을 내놓으라고 했다.
한편 정치권과 언론은 우리 군의 대응사격에 북한군은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는지 궁금해 했다. 국정원장은 국회에 출석하면서 상업용 위성으로 촬영한 북한군 진지 주변 사진을 의원들에게 보여줬다. 국정원은 또한 지난 8월 북한군의 이상동향을 청와대와 군 등에 알려줬다고 밝혔다.
이에 청와대와 군이 발끈했다. 청와대는 “한 줄 의견표시 정도로 적어놓은 걸 어떻게 우리가 모두 체크하느냐”며 반발했다. 군은 위성사진 공개로 ‘군의 대응사격 대부분이 표적을 맞추지 못하고 물에 빠졌다’는 식으로 보도되자 “연합정보자산으로 평가한 결과는 다르게 나왔다”며 반박했다.
문제는 이런 기관 간 감정대립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 안보기관들은 책임을 통감하며, 국민들께 사죄하는 모습 대신 ‘네 탓’이라며 서로 흘겨보고 있다. 여야 정치권도 서로 책임공방을 벌이느라 정신없다(다만 세비 인상에는 뜻을 합쳤다). 이렇게 연평도 포격이 발생한지 열흘 만에 우리나라 안보기관과 정치권은 북한 정권이 원하는 대로 ‘적전분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라 지키는 책임 공방하려면 모두 ‘옷’ 벗어라
이런 청와대와 안보기관들 간의 책임공방, 연평도를 빌미로 한 여야 대립, 해병대의 분전을 폄하하는 일부 언론 보도를 보는 국민들, 특히 예비역들의 마음은 착잡하다. ‘내가 저런 자들이 호의호식하는 거 지키려고 최전방에서 그 고생을 한 건가’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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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상업용 위성업체 '디지털 글로브'에서 찍은 북한 개머리 진지 영상. 이 사진 때문에 국회 정보위에서는 또 한 차례 논란이 일었다.ⓒ
책임공방이 불거질 때마다 안보기관 일선요원들의 가슴은 ‘찢어진다.’ 이 시간에도 많은 일선요원들이 적성국에서, 겨울 바다에서, 산 속에서, 최전방에서 목숨을 걸고 자기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책임 공방하는 분’들은 현실은 외면한 채 안전한 곳에 숨어 현장요원들이나 비난하며 ‘이것 바꿔라, 저것 바꿔라’ 떠들어 댄다.
오히려 국민들이 안보기관 일선요원들의 어려움을 이해해주고 안타까워한다. 국민들은 언론 카메라가 비출 때마다 온갖 제스처취하며 ‘네 탓’ 공방하는 ‘높으신 분’들을 모조리 옷 벗겨 먼 섬으로 쫓아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 시점에서 ‘높으신 분’들께서는 이 점을 알아야 한다. 국민들은 美의회가 만든 ‘9.11 테러보고서’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당장 북한의 추가 위협이 전해지는 이때 ‘우리 내부에 어떠한 문제가 있고, 적의 의도가 무엇이며 향후 어떤 대응책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제대로 찾아보고 고민해줬으면 하는 것이다.
물론 ‘나라 지키는 책임’을 놓고 지금처럼 ‘자리 지키기’를 위해 싸우는 자들이 ‘책임자’로 있는 한 이런 주장은 공허한 메아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도 ‘국민’이라면, ‘일말의 양심’은 있으리라 믿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