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년전 오늘 박동혁은 떠났다.
    2002년 6월 29일 제2차 연평해전 당시 박동혁은 해군 제2함대 고속정 참수리 357호 의무병이었다.
    NLL을 넘어온 북한 해군 684함이 측면이 노출된 참수리 357정에 집중사격을 퍼부었던 참혹했던 10여 분. 박동혁은 온몸에 파편 100여 개가 박히는 부상을 입고도 부상병을 돌보고, 마지막까지 포를 쏘며 응전했다.
    그리고 그 후 길고 길었던 84일이란 시간, 박동혁은 성남 국군수도병원 중환자실에서 죽음과 사투를 이어가다 패혈증으로 떠났다.

    당시 박동혁을 치료했던 군의관은 어린 딸에게 ‘유진아, 네가 태어나던 해에 아빠는 이런 젊은이를 보았단다’라는 글을 남겼다.

    건장하고 준수한 청년이었는데 의식은 없었고 인공호흡기가 달려 있었으며, 내가 군대온 이래로 목격한 가장 많은 기계와 약병들을 달고 있는 환자였다. 파편이 배를 뚫고 들어가서 장을 찢었고, 등으로 파고 들어간 파편은 등의 근육과 척추에 박혀있었으며, 등과 옆구리는 3도 화상으로 익어 있었다. 오른쪽 허벅지에도 길쭉한 파편이 박히고, 전신에 총상과 파편창이 즐비했다.
    “쟤는… 왜 저렇게 다쳤어요?”
    옆 침상에 누워 있던 부정장 이 중위가 입을 열었다.
    “우리 배의 의무병 녀석인데 부상자들 처치한다고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다니다가 그랬습니다.”
    이야기를 듣자 울컥했다. 멋진 놈…. 그런데, 이게 뭐냐.
    상태는 굉장히 안 좋았다. 출혈이 엄청나서 후송당시부터 쇼크 상태였고, 수술하는 동안에도 엄청난 양의 수혈이 필요했다. 정형외과와 외과 군의관들이 달려들어 가능한 대로 파편과 총탄을 제거하고, 장루를 복벽으로 뽑고, 부서진 오른쪽 허벅지의 혈관을 이어놓은 상태였다. 엄청난 외상으로 인한 전신성 염증반응 증후군(SIRS)으로 인해 혈압이 쉽사리 오르지 않아 결국, 순환기내과 전공인 나도 박 상병과 인연을 맺게 된다.
    ‘너는 반드시 살려낸다!’
    박 상병의 숭고했던 행동을 여러모로 전해들은 우리 군의관들은 암묵적으로 동감하고 있었다.
    레지던트 기간 동안 수없이 지새워냈던 하얀 밤들과 바꿔낸 중환자관리의 기술이 너무나도 기꺼웠다. 하지만, 감염부위에서 녹농균과 메치실린 내성 포도상 구균이 배양되면서 소위 항생제의 마지막 보루라 일컬어지는 이미페넴, 반코마이신, 아미카신으로 배수진을 치게 됐다. 오르내리는 체온에 일희일비하는 가운데 전신상태는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지만 오른쪽 다리가 서서히 차가와지며 색이 죽기 시작했다. 부서졌던 혈관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결국, 고관절부위에서 절단이 이뤄졌고, 사타구니 아래쪽 오른 다리는 사라졌다.
    그렇게, 3주를 지내며 더 이상의 발열도 없었고 등과 옆구리 화상부위 및 관통창에는 발간 육아조직이 자라고 있었다. 수술부위의 상처들도 자리가 잡혔다. 인공호흡기도 멈췄고, 기도절개를 미루며 버텨오던 기도관도 제거했다. 박 상병이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박 상병이 서해교전 환자들 중 가장 늦게 중환자실을 빠져나와 외과병동으로 옮겨지게 됐다. 가장 위중했던 그의 회복으로 서해교전으로 인한 전투 시의 사망자 외 추가 사망자는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고, 이에 고무된 병원 측은 수고한 군의관들에게 포상으로 위로휴가를 주었다.
    어느 날, 박 상병이 다시 중환자실로 내려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의식이 나빠져 CT를 찍어보니 뇌실질 전반에 걸친 세균감염이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예의 배수진용 항생제들은 계속 사용되던 중이었고, 중환자실에서 다시 만난 박 상병은 완연히 수척해진 모습으로 인공호흡기와 약병들에 또다시 생명을 매달고 있었다. 새로 개발된 항생제들을 민간에서 구매해서 사용하기도 해봤지만 패혈성 쇼크가 이어지며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결국 9월 20일 금요일 새벽에 젊은 심장은 마지막 박동을 끝냈다.
    그는 꿈꿔왔을 나머지 인생을 하늘로 가져가야 했고, 그의 부모님은 아들을 잃었다. 그를 만났던 군의관들의 가슴에도 구멍이 났다.

    84일을, 박동혁의 아버지 박남준씨와 어머니 이경진씨는 국군수도병원에서 통곡의 나날을 보냈다.
    기적을 바랬다. 하지만 끝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월드컵에 묻혀 참수리 357전의 희생은 국민들에게 잊혀졌다. 그리고 효순-미선이를 위해 들었다는 촛불로 이들의 존재는 서해바다에 묻히고 말았다.
    지난해 6월 홍천에서 만난 아버지 박남준씨는 “다른 것은 몰라도 NLL 만큼은 우리가 사수해야 합니다”라고 기자에게 말했다.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점심식사를 하면 반주로 나눈 소주 몇 잔 탓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가슴에 묻은 아들은 사랑스럽던 큰 아들이었다.
    함께 죽음으로 NLL을 지킨 대견한 대한민국의 수병이었다.

    박동혁이 지킨 NLL 훨씬 남쪽에서 이번엔 천안함이 격침됐다.
    8년 전의 사건이 아닌, 불과 반년도 채 지나지 않은 된 사건이었다.
    대통령은 몇 달 전 전쟁기념관에서 천안함 전사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다.
    그리고 울먹이며 단호한 대응을 맹세했다.
    그 맹세는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박동혁의 여덟 번째 기일인 오늘, 9월 20일.
    2010년 국방백서에 북한이 주적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리라는 보도가 있었다.

    박동혁의 아버지와 호형호제하는 기자는
    오늘 마땅히 홍천에 전화라도 해야 할 입장이다.
    홍천을 찾진 못해도 “형님, 마음 상해하지 마세요”라고
    안부라도 물어야할 날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마음속에 떠도는 분노에 차마 전화를 하지 못했다.
    북한이 주적이 아니라면 동혁이의 죽음은 뭔가?
    아직 서해 찬바다를 떠돌 천안함의 영혼들은 뭔가?
    동혁이를 보낸 오늘,
    동혁이에게 너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