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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丈夫 김지미
9월 12일자 조선일보의 “Why"에 실린 <박은주(기자)의 快說>이 한국 영화계의 대모 김지미를 인터뷰 했다. 역시 거물스럽고 거침이 없는 여장부였다. 할 말을 서슴없이 땅땅 하고 여성으로서의 신상문제까지도 주저함 없이 까발렸다. 속이 시원하고 통쾌했다. 제일 인상 깊었던 대목은 두 가지. 그녀의 남성관과 그녀가 겪었던 김대중 정권 하의 ‘영화계 사태’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는 “겪어보니 대단한 남자는 없더라”고 했다. 한 마디로 ‘사내 대장부’ 같은 건 없다는 환멸이었다. 어렸을 적, 할머니 어머니가 “쯧쯧, 저것도 사내 콧배기라고...” 하고 멸시하는 말을 종종 들었다. 평시엔 온갖 호기 다 부리다가도 진짜 결정적인 순간에는 나약 비굴 의리부동(義理不同) 옹졸 쩨쩨함의 ‘웃겼어’를 드러내는 남자 놈들. 여자한테 이런 꼴을 들키는 날 그놈은 끝장이다. 그녀가 그런 남자들만 만난 것인가, 남자란 다 그런 것인가?
요새 봐도 딸들은 갈수록 더 야무져 가는 데 아들놈들은 왠지 갈수록 문열이 같은 마마보이가 돼간다. 군대 나가서도 툭하면 휴대폰으로 사커맘(soccer mom)을 불러내 “엄마아아아, 전쟁 난데...나 무저워...으으으..." 한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부계(父系) 사회에서 다시 모계(母系) 사회로 가는 건가? 필리핀에서도 나라를 이끄는 역군들은 여성들이다. 공공 사무실에 가 봐도 남자는 가뭄에 콩 나듯 하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세상이 달라지면서 남자들이 군자(君子), 헌헌장부(軒軒丈夫), 전사(戰士), 대경대도(大徑大道), 일신(一身)을 던져, 상소(上疏)정신, 백절불굴(百折不屈), 하는 상(像)에선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만은 지울 수 없다, 이게 좋은 거고 잘 되는 건가?
김지미가 겪은 ‘영화계 사태’ 또한 가관이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자 웬, 김지미로서는 듣도 보도 못하던 작자들이 작당해서 들고 일어나며 “나이든 자들 다 물러가라” 하더라는 것이다. 꼭 '혁명군'처럼. 자고 일어나 보니 길거리에 완장 찬 무리들이 곡괭이와 죽창을 들고 설치는 건 옛날에나 흔히 있던 일이다.
그러나 옛날 아닌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혁명 아닌 투표를 했을 뿐인데도 김지미가 보기엔 꼭 혁명이라도 난 것 같았던 모양이다. “다 나가라니, 부모가 잘 못하면 업어다 고려장 하나?” 하는 게 김지미의 답변이었다. “젊은 사람들이 창의력 있지 않나?” 하니까 그녀는 “창의력은 개인이 하는 거지 떼로 하나?”고 되물었다. 떼거리, 집단폭력, 조반유리(造反有理), 숙청, 초(超)법적 뒤집어엎기, 겁주기, 모욕 주기, 린치, 길거리 재판...1960년대 천안문 앞 풍경이었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왜 자꾸 그게 연상되는지 알 수가 없다.
<류근일 /본사고문,언론인/류근일의 탐미주의클럽 cafe.daum.net/aestheticismclu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