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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점령당한 금산을 탈환하기 위해 왜군과 싸우다가 옥쇄한 의병장 조헌과 수하의병 700명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충남 금산군 금성면에 세운 금산 칠백의총이 중요한 역사적 사실(史實)이 외면됐다는 지적이 불교계에서 나왔다.
함께 참전하고 함께 전사한 승병 800명의 업적이 누락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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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산 칠백의총ⓒ자료사진
칠백의총은 임진왜란 당시 조헌 장군 등이 옥쇄한 3일 만에 유생들에 의하여 시신이 수습되어 현재의 자리에 모셔지고, 전쟁 후 선조가 조헌의 묘비와 전각 등을 세웠다. 한일합방 후 일본인들에 의하여 파괴되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대 초 현재의 모습으로 조성했다
경내에는 묘소와 ‘종용사’라는 사당, 기념관, ‘칠백의사 순의 탑’ 등이 있다.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이하 대불총)은 이 칠백의총이 역사의 반쪽만 담고 있다고 문제점을 제기했다.
대한생활불교회 김덕수 박사는 “당시 금산 전투에 조헌의 의병 700명과 영규대사의 승병 800명이 동시에 전투에 참가하고 함께 옥쇄를 하였다”며 “지금까지 승병 800명은 빠진 채 칠백의총으로 모셔지고 있는 것은 억불숭유 정책으로 승려들의 신분이 최하급으로 낮추어져있는 상태에서 권력계층의 유생들이 ‘유생들이 지휘했던 의병’만 고려한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김 박사는 이조실록 등도 승병 800명의 옥쇄 사실이 기재하고 있다고 밝혔다.대불총은 칠백의총의 각종 기록에도 영규대사와 승군의 참전을 표시하고 있다고 확인했다.
칠백의총의 기념관내에 소장된 ‘금산혈전순절도’나 700의총 홈페이지의 설명에도 ‘전라관군에게 금산성 공격의 전기(戰期)를 알리고 같이 협공하자고 한 후, 15일 유성에 진출해 영규대사가 이끄는 수백명의 승군과 다시 합세 하여 진군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기록엔 “영규대사는 장창과 낫으로 무장된 승병을 독려하면서 ’생사(生死)의 명(命)은 재천(在天)이다. 다만 의를 좇아 순(殉)할 뿐이다‘라고 외치면서 구름같이 밀려오는 왜적을 무수히 무찔렀다”라고 구체적인 상황 설명도 보인다..대불총은 “영규대사와 승병의 참전을 인정하면서 800명의 승병이 제외된 칠백의총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 왜곡”이라며 “천오백의총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