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장 끝없는 도전 ⑫  

     나는 태산과 함께 다시 스미스씨 집에서 묵게 되었다. 당장 김윤정한테 맡길수는 없었던 것이다. 금방 원기를 회복한 태산이 응접실과 침실을 둘러보더니 나에게 물었다.
    「아버님, 이 곳이 우리 집입니까?」

    그 말을 들은 내 가슴이 내려앉았다. 집까지 따라온 박용만과 김일국도 입을 다물었다.

    「아니다. 잠깐 빌렸을 뿐이다.」
    겨우 내가 그렇게 말했더니 태산이 창 밖을 내려다보면서 다시 묻는다.
    「여기서 서양 학교에 다닐 수 있습니까?」
    「먼저 영어 공부부터 하고.」
    「아버님이 가르쳐 주십시오.」

    어른처럼 말했다가 금방 호기심 많은 아이로 돌아간 태산이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박용만이 말했다.
    「보살필 유모가 있어야 됩니다.」

    그 순간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열기가 뻗쳐 올라왔으므로 나는 어금니를 물었다. 태산 엄마의 저의(底意)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태산을 보내 놓으면 어미가 꼭 필요할테니 가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 될 것이다. 태산 엄마는 그것을 바라고 수만리 여정길에 제 자식을 혼자 보낸 것이 아닌가.

    내 표정을 살핀 박용만이 말을 이었다.
    「김대리공사가 데리고 있겠다니 며칠 후에는 맡기시는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때 밖에 나갔던 태산이 다가와 묻는다.
    「아버님, 어머니는 언제 데려오실 겁니까?」
    내가 시선만 주었더니 태산이 말을 잇는다.
    「어머니가 절더러 아버님께 꼭 말씀드리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시켜 어머니를 미국으로 데려오라고 말입니다.」

    태산이 외운 듯이 조리 있게 말을 하는 동안 나를 포함한 박용만과 김일국은 몸을 굳힌 채 듣기만 했다.

    이윽고 내가 물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더냐?」
    「예, 아버님.」
    「네 할아버님은 어디 계시냐?」
    「모릅니다.」
    「모르다니?」
    「집에 안계셨어요.」
    「어디 계신지도 몰라?」
    「예.」
    「네가 배를 타고 떠날때도 할아버지께 인사도 드리지 않았어?」
    「예.」

    그때 헛기침을 한 박용만이 입을 열었다.
    「형님, 저녁을 지어드셔야 할테니 제가 나가서 음식을 좀 사오지요.」
    「아닙니다.」
    정신을 차린 김일국이 질색을 하고 박용만을 말렸다.
    「제가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곧 식기와 음식이 날라져 올 것이오.」

    그 사이에 태산은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새 환경이 신기한데다 아버지까지 만난 터라 발걸음이 가볍다.

    길게 숨을 뱉은 내가 박용만과 김일국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 자식을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조선 땅에 있을 때도 계몽운동이네 뭐네 하면서 떠돌아다니다가 6년 세월을 감옥서에 갇히고 나서 두달 만에 이곳에 온 내 꼴을 좀 보게나.」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손 등으로 눈을 닦은 내가 말을 이었다.
    「태산 엄마가 나를 깨우쳐 주려고 이러는 것 같네. 제 자식, 제 가정도 돌보지 못한 인간이 무슨 일을 하는 것이냐고 말일세.」

    둘은 우두커니 선 채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