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동적인 웅변가, 타고난 선동가, 교양 높은 연설가로 이름 높은 이승만.

  • ▲ 박영효 옹립을 주장하다가 역모죄로 투옥된 이승만의 죄수 모습. 
    ▲ 박영효 옹립을 주장하다가 역모죄로 투옥된 이승만의 죄수 모습. 


    배재학당 시절 시작된 이승만의 연설은 독립협회의 주역이 되면서 진가를 발휘했다.
    1894년 청일전쟁, 1895년 10월 일본의 민비 살해(을미사변), 1896년 2월 고종의 러시아 공관 피신(아관파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으려는 쿠데타 실패로 황해도 피신, 서재필의 독립협회 결성과 이승만의 활약...갈수록 그는 격동기의 젊은 지도자로 변신해 갔다. ‘독립신문’의 개혁운동에 분노한 고종이 서재필을 미국으로 추방하고, 이승만이 창간한 민간최초 일간지 ‘매일신문’도 문을 닫아야 했을 때, 남은 것은 ‘대중 연설’뿐이었다.
    1898년 11월 5일, 수구세력의 음모에 갇혀있는 고종은 독립협회 간부 17명을 일제 검거해버렸다.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 한다는 혐의라며 ‘역적 처단’ 포고문이 나붙던 날, 이승만은 아펜젤러 집으로 달려갔다. 숨어있던 독립협회 3대회장 윤치호와 회원들이 함께 피신하자는 권유를 뿌리친 이승만은 경무청으로 직행하였다. 그를 따르는 군중은 금방 수천명으로 늘어났다.
    “독립지사들을 즉각 전원 석방하라, 국왕이 약속한 개혁을 실천하라” 외치며 그 순간부터 이승만은 경무청장 집무실 앞에서 최초의 서양식 연좌농성에 돌입한다.
    아버지 이경선은 6대독자 죽는다며 눈물로 만류했고 아펜젤라등 많은 선교사들도 찾아왔지만 이승만은 요지부동이었다.
    군중 속에는 각종 소문이 난무했다. 국왕이 시위대 사살명령을 내렸다더라, 고종이 이승만에게 고위직을 제의했고 뇌물까지 주었다는 둥 뜬소문이 떠돌았으며, 실제로 왕실 측근들이 찾아와 회유공작을 펴기도 했다.
    날마다 이승만은 쉴새 없이 연설을 계속했다. 밤이면 모달불을 피워 놓고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절대로 시위대가 흩어지지 말라고 외쳤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 유명한 말, 그로부터 48년후 미국 망명서 돌아와 해방조국 민중들에게 귀국 제일성으로 외쳐야 될 줄을 그는 그때 알았을까.
    추위와 배고픔과 졸음에 시달리는 데모대 앞에 군악대를 앞세운 군부대가 나타났다.
    연설하던 이승만은 군악대에 돌진하였다. “돌아가라, 돌아가라” 발길로 대원들을 걷어차며 밀어 붙였다. 데모대도 합세했다. 행진은 중단되고 군인들은 되돌아섰다.
    이튿날 신문에 이승만은 ‘싸움패’로 기사화 되었다.
    날마다 궁중을 압박하는 데모에 견디다 못한 고종은 5일 만에 구금된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석방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날 밤을 이승만은 후에 이렇게 기록했다. “드디어 17명이 석방되었는데 나는 참으로 득의충천하였다. 민주주의를 향한 위대한 승리가 달성된 것이었다.”(영문 <자서전 개요>)
    1차 목표를 쟁취한 승리감에 한껏 고조된 이승만은 2차 투쟁에 돌입하였다. 덕수궁 정문인 인화문(仁化門: 일제가 철거하고 법원청사를 지음) 앞에서 철야농성을 계속했다.
    “헌의육조(獻議六條)에 명시된 개혁을 실현하라”는 것, 헌의육조는 8월에 독립협회가 고종에게 제시하여 약속 받았던 왕정개혁안으로 입헌군주제가 골자다.
    고종은 개혁파 민영환을 불러 소요사태를 무마하라고 지시했다. 민영환이 나서서 해산을 조용했으나 그래도 이승만은 완강했다.
    “똑 속지는 않겠다. 행동으로 보여라. 여러분, 절대 해산하면 안됩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무마책에 동요하는 군중 앞에서 이승만은 움직이지 않았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회원들을 이끌고 밤낮으로 시위를 멈추지 않는 이승만의 결의 앞에서 급기야 친러시아 수구파는 ‘황국협회’ 보부상들을 동원, 습격작전을 폈다.
    11월21일 아침, 왕궁 앞의 정동광장(현 정동교회앞) 통나무에 올라 이승만이 열변을 토하고 있을때, 수구파 두목 길영수가 나타났다.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힌 이승만은 그에게 달려들어 미친 듯이 걷어찼다. 이때 보부상 2천여명이 무차별 공격하는 곤봉세례 속에서 이승만은 잡히고 말았다. 동료들은 안보이고 보부상들뿐, 그때 누군가 속삭임이 들렸다.
    “존경하는 이승만님, 빨리 빠져나가세요.” 어떻게요? 빨리요....어떤 빛줄기 같은 영감이었다고 이승만은 훗날 기억한다. 그후 오랜 망명생활중에도 위기의 순간마다 그에게 속삭여주는 영감이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고 썼다.
    이승만은 뛰지 않았다. 대신 보부상 무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정신없이 군중을 헤집고 배재학당까지 걸었다. 가까스로 학당에 가보니 친구 김원근이 뛰어들면서 “이승만이 길영수 놈에게 잡혀 죽었다”고 엉엉 목놓아 우는 것이었다. 이날 신문들도 이승만이 길영수와 난투극을 벌이다가 살해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날 밤 군중을 다시 정돈한 이승만은 배재학당을 출발하여 종로로 진출했다.
    연단에 오르자 함성이 올랐다. “이승만이 살아 왔다!!” “열혈 애국청년이다!”
    시가전을 방불한 사흘간의 혈투에서 인망 높은 김덕구가 용산 근방에서 피살되었다.
    인산인해를 이룬 김덕구 장례식이 열리던 날, 폭동과 혁명이 두려운 고종황제는 손을 들고 말았다.

    11월 26일, 돈화문 광장에 급히 차린 회견장에 독립협회와 황국협회 간부들이 모였다.
    궁을 나온 국왕은 양측 대표 윤치호와 길영수를 직접 호명하면서 정부 개혁을 다짐했다.
    독립협회의 부활, 수구파 대신 ‘5凶’ 조병식 유기환 이기동 민종목 김정근의 유배, 보부상의 해산, ‘헌의6조’와 ‘조칙 5조’등의 실천, 그리고 시위 주동자들을 절대로 구속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발표했다.
    고종은 초청된 외국 대사들과 사절단을 돌아보면서 “여러 외국분들이 증인이 되어주시오”라는 당부까지 덧붙이는 것이었다.
    개혁의 핵심은 독립협회의 건의대로 입법권을 갖는 ‘중추원(中樞院)’을 즉시 구성하는 것이다.
    수구파와 개혁파 양측 25명씩 50명의 대표를 선출하겠다는 제안을 황제가 직접 나서서 공개 약속한 것--행동으로 보이라고 요구한 이승만의 대승리였다.
    11월29일, 5천년 왕국 역사상 최초로 구성된 ‘원초적 국회(Embryo National Assembly)’ 중추원, 이승만도 물론 의관(국회의원)으로 임명되었다. 약관 23세의 국회의원, 종9품 벼슬이다.
    이것은 양녕대군 16새손인 왕족 이승만이 조선왕조로부터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벼슬이었다. 
    이승만은 국회가 열리자마자 왕정개혁의 일환으로 전면 개각을 주장했다. 일본에 망명중인 개화파 주역 박영효를  옹립하자며 날마다 과격한 캠페인을 계속해 나갔다. 박영효는 역적인데 역적을 옹립하다니...결국 변심한 고종은 한달 남짓되어 국회를 해산하고 이승만도 투옥되고 만다. 죄목은 황제폐위 역모. 의관 벼슬은 꼭 35일간의 생명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