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9세대의 李承晩 재발견

    나의 4·19는 20일 수원 驛前에서였다. 대학 4학년, 경찰대의 총열에서 날아오는 최루탄 깡통을 터지기 전에 되받아 차면서 우리 스크럼은 전진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李承晩은 타도되어야 할 「노욕의 반민주 독재자」 그것이 전부였다. 여기에 수정을 가할 동기나 계기가 이후의 정치사 속에 있지 않았고, 이같은 李承晩像은 4·19를 뛰었던 세대의 가슴 속에 化石으로 남았을 것이다.
     나의 李承晩 재발견, 正視는 북의 金日成을 통해서였다. 金日成은 94년 3월 NPT(핵확산 방지 조약)를 탈퇴하고 전쟁공갈을 치면서 미국을 씨름판으로 불러냈다. 94년 6월 美北 제네바 1차회담에서 북한은 아무것도 내 놓은 것이 없는 채로 미국으로부터 핵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받아냄으로써 그들이 교섭상의 우위에 있음을 드러내 보였다. 심히 놀라운 일이었다. 金日成이 오늘의 유일 초대 국인 미국을 을러대는 노하우가 어디서 왔을 것인가가 나는 궁금했다. 北이 협상판에서 2년간이나 미국과 밀고 당겼던 6.25의 휴전회담(51년 7월~ 53년 7월)인가 싶어, 보고 싶었다.
     공산측이 상대의 교섭의지를 소진시킴으로써 협상우위를 노리는 수법이 눈에 들어 왔지만, 전과정을 훑으면서 나는 巨人 李承晩을 발견하게 되었다. 반도의 통일같은 것은 아랑곳없이 휴전하고 보겠다는 美國 앞을 가로막은 최대의 장벽은 결국은 공산측도 아니었고, 당시로서는 그들이 업고 있다고 생각했을 나라-한국의 대통령 李承晩이었다. 한국에 절대적인 도움을 주고 있던 美國이지만, 국익의 분기점에 다다르자 李承晩은 맞섰던 것이다.
     한국전쟁의 뒷방노인 李承晩이 휴전회담의 마지막 타결단계에서 단독북진론으로 휴전에 대한 절대거부권을 카드화했다. 회담에서도 제외되었던 자가 상황전개의 한복판에 버티고 서 버렸다. 휴전이 다급했던 모택동과 처칠이 이승만 요구 들어주라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압력 넣는 국면이 벌어졌다. 이승만은 경무대에 앉아 미국 대통령 특사를 불러 휴전 이후의 국가경영에 필요한 결정적 수단들을 일거에 미국으로부터 받아 냈던 것이다. 한국은 초토화된 국토의 戰後 복구비와 경제원조, 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무장,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등을 구걸이 아니라 미국을 봐주는 모양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의 반공포로 석방은 같이 싸운 자유진영을 향해 이념의 고지를 독점하고 단독북진론에 현실미를 부여하는 전략적 高手였던 것이다. 대한민국 오늘의 번영의 울타리가 이때의 이승만의 전략안과 운명적 결단의 산물임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휴전과정을 보면서 「金日成의 전쟁 공갈을 곁들인 NPT탈퇴선언이 李承晩의 단독 북진론을 흉내냈구나」라고 나는 직감했다. 大國이 소망하는 정치이익을 一身을 내어 던짐으로써 「파투(破鬪)」 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전략수단화한 李承晩의 수법을 金日成은 배운 것 같다.

    國父의 傳記 읽지 않았다는 자괴감

     李承晩에 괄목하는 이유는 위에서 든 李承晩 전략의 실천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권력을 잡았다고 대통령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一身의 생명과 스스로의 권력기반과 3천만의 禍福과 온 國運을 거는 운명적 결단을 견뎌내는 인격은 예사롭다고 할 수가 없다.
     李承晩이 李承晩 전략을 실행해 냈다는 것은 당시의 한반도 내외정세를 감안할 때 그가 첫째로 불퇴전의 주인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 둘째로 이를 당연히 내면에서 뒷받침해내는 강렬한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소유자였다는 것, 셋째로 국제정치에 대해 마키아벨리적 전략감각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 넷째로 국가의 全기능에 대한 고도의 장악력의 견지, 다섯째로 온국민의 聲望이 일신에 집중할 때만이 가능한 고양된 정신의 사명감 등을 그가 가졌음을 짐작케 한다.
     「노욕의 독재자」로 화석화된 우리세대의 이미지와의 사이에 있는 거리가 거부하고 싶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왈칵 李承晩의 전기를 들춰보고 싶어졌다. 나라를 세운 대통령인 그의 전기를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고, 이어서 오늘의 일본을 경제 초대국으로 만든 국가전략을 설계한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 수상, 「프랑스의 영광」 드골 대통령, 죄 많은 독일을 자유독일로 다시 나게 하여 서구사회에 착근케 한 아데나워 수상의 전기류는 이미 들쳐보았다는 주제가 스스로 부끄러웠다.
     이 세 사람은 李承晩과 비슷한 시기에 집권했던 李承晩의 동시대人들이다. 李承晩 자료를 뒤적이고서 느낀 소감은 李承晩이 우리 민족국가 위에 남긴 성취와 인간의 크기는 아데나워 등의 3人에 비해 상대적으로 컸으면 컸지 적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런 얘기를 여기서 풀어서 할 겨를은 없지만, 문제가 된 李承晩의 권위주의적 통치행태라는 것도 요시다 수상이나 드골 대통령 등이 李承晩보다 덜 할 것도 없는 사람들임을 알게 된다. 李承晩 등 네 사람은 당시의 세계大勢, 국제정치에 모두 달통한 지도자들이었지만, 知力이나 식견이나 인격의 고매성에 있어서는 동서의 학문을 겸비하고, 大義 앞에 몸 던져 죽음을 넘어온 李承晩 쪽이 더욱 돋보인다는 것이 솔직한 소감이다. 우리 역사는 있는 재산도 스스로 깎아내리면서 못나게 살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李承晩 리더십의 비부(秘府)를 더듬어보고자, 간략할지라도 그의 전기류에서 李承晩의 아이덴티티(정체성) 문제와 카리스마 형성점을 들여다보겠다.
     시인 미당 徐廷柱가 청년시절에 쓴 것으로 보이는 「李承晩전기(1949년 三八社 간)」가 있다. 미당의 천재적 감성이 인간 李承晩에서 포착했을 뭣인가에 부딪히고 싶어서 유심히 뒤졌다. 나는 두 가지에 부딪혔다.

    「朝鮮 사람」李承晩

     일본이 한국을 삼킨 1910년, 그해 李承晩은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10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겨울 미국에서 공부하고 6년 만에 돌아온 36세의 李承晩은 매일같이 서울이 내려다보이는 남산 언덕에 올라 연을 날렸다는 것이다.
     未堂의 이 지적은 비교적 상세한 이원순의 「인간 李承晩」(신태양사)이나, 미국인 고문인 올리버의 「李承晩」 속에도 보이지 않는다. 미당은 이렇게 적고 있다.
     「합병되는 해의 한 겨울을 날마다 남산 마루턱에 올라, 종이연을 하늘에 띄워 놓고는 자새(얼래)에 감긴 실을 풀었다 감었다 하며 수두룩히 짓밟히고 있는 조국의 혼을 모조리 그의 속에 불러들이기에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독립투쟁을 위한 모든 개인적인 준비를 끝내고서 亡國의 산하를 앞에 한 연날리기, 미당의 기록에서 나는 두 가지의 함축을 읽는다. 첨단의 개화풍을 세례 받고 온 李承晩이 가장 「조선적」인 연 자새를 잡았다는 것과 李承晩의 시선이 「오늘」「여기」에 있지 않고 연과 함께 창공 속에, 바람 속에 「내일」「저기」에 있었다는 것, 두 가지다. 이후 서(西)적 세계 속에서「조선적인 것」을 고집하여 「내일」「저기」를 지향하는 李承晩의 투쟁에 쉼은 없었다.
     미당이 쓴 전기에서 또 하나 특출한 지적은 李承晩이 「조선사람」이더라는 대목이다. 머리말에서 미당은 李承晩을 구한말에서 「현재」까지 한 세기 변화 많은 세월 속에서 누구보다도 변하지 않은 「조선사람」이라고 했다. 미당이 李承晩과 만났을 때는 유학시절까지 합쳐 40여년의 美洲 생활 다음이었으니까, 요즘처럼 내왕이 있은 것도 아니고, 웬만하면 말조차 잊어버렸을 세월을 떠올리면서 미당은 李承晩의 강렬한 「조선인 아이덴티티」 앞에 취했던 것 같다.
     인격적 에너지와 리더십의 모반(母盤)인 아이덴티티 문제는 李承晩의 경우 간단치 않다. 고문인 로버트 올리버는 李承晩을 「미국정신의 완벽한 구현자」라고 하고 있다. 이승만 인격속에 있는 크리스챠니티의 구현을 보았을 것이다. 이승만은 이미 10대 말에 과거응시 하느라고 사서삼경이나 통감절요 등으로 선비적 교양은 육화되어 있었다. 李承晩 속에는 東적인 것도 있고 西적인 것도 있다. 아이덴티티의 정신분석학자 에릭슨의 도움을 받는다면, 다양한 下位 아이덴티티 위에 틀어 올라앉은 아이덴티티, 프로테우스(여러가지 얼굴을 한 海神) 的 인간형(에릭슨이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미국의 3대 대통령 제퍼슨에 가한 규정)인 것 같다.
     李承晩이 집권과정 이후 권력합리주의의 세계 속에 섰을 때 그는 다양한 권모를 동원했다. 마키아벨리적 西의 권모도 있었고 韓非子적 東의 권모도 있었다. 그는 정적들의 치떨리는 증오 속에 있었다.

    죽음 극복을 통한 카리스마

     흔히 얘기하는 李承晩 리더십의 핵심, 그 카리스마(원래 천부라는 뜻이지만)의 형성점을 故 李炳注는 20대 후반의 李承晩의 受刑과정에서 찾고 있는데 나도 동의하고 싶다. 에릭슨은 불멸의 아이덴티티가 형성되는 한 과정을 죽음과의 대치에서 제시하고 있다.
     有에의 집착이 아닌 無의 강조, 죽음 혹은 자기부정이 영원한 생명에의 제일보가 되는 초월적 영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으로써 이룩되는 성취(die and become)의 차원인 것이다.
     그런데 李承晩은 여러 번 죽었다. 독립협회 운동중 만민공동회의 선두에서 皇國協의 보부상들의 덮쳐오는 「폭력의 숲」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 통과하여 그때 이미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체포되어서는 죽음이 차라리 유혹인 고문과 혹형의 터널을 지나가면서도 신념을 버리기를 거부했다. 그의 아버지는 소문 듣고 옥문 밖으로 여러 번 시신 수습을 하러 갔었다 한다.
     설명하기 힘들게 그는 살아났던 것이다. 3·1운동 직후 국내와 중국 상해와 노령 블라디보스톡에 임시정부가 생겨났는데 하나 같이 멀리 미국에 있는 李承晩을 首長으로 추대했다. 선거운동이 있었을 것도 아닌데 45세 전후해서 그의 카리스마는 全민족 위에 퍼져 있었던 것을 알게 된다.
     李承晩이 스스로는 그 내면에서 우리 민족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했을까. 얼핏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는 유태족을 이끌어낸 해방자, 입법자 모세의 역을 스스로에게 얹어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구약에는 그렇지 않지만 유태족의 原父 모세는 유태족에게 학살되었다고 한다(『프로이트 전집』「모세와 一神敎」).
     이 原父살해의 죄의식이 윤리에의 심적 에너지가 되어, 유태인의 집단 심리 속에 수백년을 두고 잠복, 회귀되어 모세의 가르침인 일신교와 潠民 사상은 유태교로 강화, 정착 되었던 것이다.
     李承晩은 소련에 대해 유화적이면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주무르던 국무성의 뉴 딜러들보다 훨씬 앞서 세계 규모의 냉전개시를 꿰뚫어 보았다. 국제정세의 내일을 유일하게 내다본 李承晩이 單政 노선을 제시하고, 그의 리더십이 난마같은 우익세력을 묶어내어 미국의 신탁통치정책, 좌우합작 노선을 패퇴시킴으로써 대한민국은 탄생되었다. 그의 單政노선이 옳았다는 것을 공산주의가 패망한 세계사 오늘의 도달점이 입증하고 있다.
     대한민국에 관한 한 李承晩에게 原父的인 것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신생 조국에서, 李承晩이 없는 예산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게 교육진흥이었다. 李承晩의 민족교육,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첫 세대가 소위 ‘4.19세대’다. 4.19세대야말로 그들의 민족적 原父를 찾는다면 李承晩을 두고는 없을 것이다. 4.19세대가 李承晩의 교육정책으로 불어난 대학을 통과하면서 李承晩 교육에서 배운 민주주의로 原父 李承晩을 (정치적으로) 학살했던 것이다. 오늘의 4.19세대는 영웅 오이디푸스처럼, 유태족처럼 原父를 학살하면서 성장했다.
     殺父설화의 정신분석이 가르쳐주는 것은 아들들에 의한 原父의 부활과 화해다. 그것이 다음 단계 성장의 조건인 것이다. 유태교 속에 부활된 모세처럼 부활된 原父 李承晩은 대한민국의 발전에 관한 한 강화된 윤리적 요구의 원천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의 4.19세대와 「原父」 李承晩과의 화해를 딛고서 대한민국 융성의 지보는 무궁할 것이다.
    <‘월간 조선 1995년 1월호 게재 / *현시점에 맞춰 부분수정됨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