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국과정에서의 이승만의 통합노선과 그 반대세력들
         <1>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박사를 민족을 분열시키고 국토를 분단시키는 데 앞장선 분열주의자라고 욕한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가 건국과정에서 실제로 한 행동을 추적해 보면 이 박사는 분열주의자가 아니라 시종일관 민족의 단합을 주장해온 통합주의자이다.
     이 박사는 해방 후 미국으로부터 귀국한 다음 날인 1945년 10월 17일 저녁 자신의 귀국을 국민에게 알리는 방송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정당과 당파를 협동하여 한 개의 덩어리를 만들어 가지고 우리 조선의 완전무결한 독립을 찾는다는 것이 나의 희망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기회는 전무하고 후무한 것입니다. 연합국 사람들이 한인들에게 한 번 기회를 주고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모든 갈등과 사사관계를 다 없애버리고 강력한 정부의 수립으로 향하여 합력하면 다 잘 될 것을 내가 잘 압니다.”

     이 박사는 이후 인사차 자기를 찾아온 국내의 모든 정치인들에게 한결같이 “합동통일을 유일한 방법 수단으로 하여 자주독립의 조급한 실현을 도모할 것만이 우리에게 맡겨진 절대한 과제라는 것을 믿고 오직 이 길을 위하여 단합하는 전진이 있기만 바랄 뿐입니다”라고 거듭해서 당부했다.
     이 박사의 이러한 당부에 자극받아 10월 23일 당시 국내에서 활동하는 모든 정당의 대표들이 모여서 조선독립촉성 중앙협의회 결성을 위한 준비모임을 가졌다. 이 시기에 이 박사는 민족통합을 위해 공산당에 대해서도 포용적인 태도를 표명했다. 그는 독촉중협 결성 준비 모임에서 “공산주의든지 민주주의든지 서로서로 악수할 점이 있으면 지금은 무조건 악수하고 나갑시다”라고 말했다. 그 며칠 후에 행한 방송연설에서는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습니다”라고도 말했다.
     이 박사는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협정이 발표된 직후 모스크바협정에 대한 좌우 진영의 태도가 대립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할 때도, 모든 정당들의 단합을 촉구했다. 이 박사는 1945년 12월 28일 기자회견에서 “8월 15일 후 우리 국내에는 50이 넘는 정당이 난립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한심함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 중 가장 긴급한 문제는 완전 독립이 아닌가. 그러자면 하루 빨리 뭉쳐야 할 줄 안다. 한데 뭉치어 우리 땅을 우리 국가를 찾어놓고 전인민의 총선거를 단행하여 새 국가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될 줄 안다.”라고 다짐했다.
     이 박사는 민족통합을 추구하는 자신의 정치노선을 일민주의(一民主義)라고 천명했다. 이 박사는 1949년 9월에 발행된 『일민주의 개술』이라는 팜플랫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민(一民)이라는 두  글자는 나의 오십년 [민권-독립-건국]운동의 출발이요 또 귀추이다.…나는 일민주의를 제창하여 이로써 신흥국가의 국시를 만들고자 한다.…하나인 민족으로써 무엇에고 또 어느 때이고 둘이 있을 수가 없다. 계급이 없어야 하며 차등이 없어야 한다. 하나이거니 지역[차별]이란 무엇이며, 하나이거니 남녀[차별]이란 무엇이냐.…우리 민족은 하나다. 국토도 하나요, 정신도 하나요, 생활에도 하나요, 대우에도 하나요, 정치상 문화상 무엇에고 하나다.…헤치면 죽고 뭉치면 산다. 나뉘어지는 데서 죽고 일(一)에서 산다.”
     
     이 박사는 해방 후 귀국 직후부터 대한민국 건국 때까지 일민주의로 표현되는 민족통합노선을 일관되게 견지해왔다. 그러나 건국과정에서 이 박사의 이러한 민족통합노선은 3개 반대세력의 반대에 부딪쳐 제대로 관철되지 못했다. 건국과정에서 이 박사의 민족통합노선에 반대한 3개 세력이란 공산주의세력, 좌우합작세력, 김구세력 등이다.

         <2>

     공산주의세력은 이 박사의 민족통합노선에 제일 먼저 반대하고 나선 세력이다. 공산당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초기 단계에서 친일파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여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기 전에 친일파부터 먼저 가려내자고 고집했다. 이 박사는 친일파는 반드시 숙청해야 하지만, 친일파 가려내는 일부터 먼저 하게 되면 그를 둘러싸고 정치세력 간의 논쟁이 끝없이 계속되어 독촉중협 결성이 한 없이 늦어질 것이니, 모든 정당이 단합하여 우선 독촉중협을 결성해서 그것을 토대로 하여 연합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난 후 친일파 숙청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법률에 따라 친일파를 숙청하자고 공산당을 설득했다. 공산당은 이 박사의 설득을 외면하고 자기들의 주장을 고집하다가 머지않아 독촉중협에서 탈퇴했다.
     공산당이 그처럼 비이성적인 주장을 하면서 조국의 조속한 독립을 방해하자, 그때부터 이 박사는 공산당에 대한 반대입장을 취했다. 이 박사는 1945년 12월 19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방송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반공입장을 천명했다.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 것을 우리는 세계각국에 대하여 선언합니다. 이왕에도 재삼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공산주의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오, 공산당 극좌파들의 파괴주의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소위 공화국이라는 명칭을 조작하여 국민 전체에 분렬상태를 타인에게 선전하기에 이르다가, 지금은 민중이 차차 깨어나서 공산에 대한 반동이 일어나매 간계를 써서 각처에 선전하기를 저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요 민주주의자라 하여 민심을 현혹시키니 이 극렬분자들의 목적은 우리 독립국을 없이 해서 남의 노예로 만들고 저의 사욕을 채우려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이 분자들과 싸우는 방법은 먼저는 그 사람들을 회유해서 사실을 알려주시오.…시종 고치지 않고 파괴를 주장하는 자는 비록 친부형이나 친자질이라도 원수로 대해야 할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과 그에 동조적인 저술가들은 오늘날에도 이 박사의 반공주의가 민족분열을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이 진행된 순서를 보면, 공산당이 민족분열적 태도를 취하며 민족통합을 저해하자 그에 분노한 이 박사가 반공입장을 취한 것이 분명하다. 이 박사의 반공입장은 정치세력들의 분열을 초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세력들의 단합이 공산당으로 인해 더 이상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 박사의 반공은  ‘분열지향적 반공’이 아니라, 공산당의 분열작용으로부터 정치세력들의 통합을 보호하기 위한  ‘통합지향적 반공’이었던 것이다.
     이 박사의 반공은 북한주둔 소련군과 북한공산세력이 이른바 ‘민주기지론’전략에 입각하여 1946년 2월 북한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단독정권을 조직하면서부터 한 층 더 강경해졌다. 그들의 말하는 ‘민주기지론’이란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어서 공산화가 용이한 북한을 먼저 공산화한 다음 그것을 기지로 삼아 남한까지 공산화한다는 전략이다. 소련과 공산세력의 이러한 의도를 간파한 이 박사는 장차 한반도를 공산주의 아닌 체제로 통일하려면 우선 남한의 공산화를 막아야 하겠으며, 남한의 공산화를 막으려면 남한에서 민중의 뜻에 따른(바꾸어 말하면, 선거에 따른) 민주정부를 조속히 구성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한에서 민중의 뜻에 따른 정부가 안정되면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남북통일을 추진한다는 것이 이 박사의 구상이었다.
     남한의 공산세력은 이러한 이 박사의 구상과 노력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이 박사의 구상과 노력을 민족분단을 초래하는 분열주의적이고 반민족적인 망동이라고 욕해댔다. 공산세력의 ‘민주기지론’ 전략이나 이 박사의 구상을 잘 모르는 정치인과 언론인들도 덩달아 이 박사의 그런 구상과 노력을 민족분열적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박사의 그러한 구상과 노력은 남북한 전체를 공산화통일하려는 공산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민족분열적인 것(공산화통일을 저지하는 것)이나, 그런 공산화통일을 반대하고 비공산화통일을 바라는 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민족통일적인 것(비공산화통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어쨌든 공산세력은 남한에서 민중의 뜻에 따른 정부를 세우려는 이 박사의 주장과 노력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에 대응하여 이 박사의 반공입장도 더욱 강경해졌다. 남한까지 공산화하려는 공산세력의 공세에서 남한만이라도 공산화를 면하게 하려면 반공입장을 더욱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은 공산화통일을 위해 남한에서 선거에 의해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막으려는 공산세력과 그들 공산세력의 저지를 분쇄하고 선거에 의한 정부를 수립하려는 이 박사 및 그 지지자들 간의 투쟁과정이 되었다.            
         <3>

     공산당 다음으로 이 박사의 민족통합노선에 반대한 세력은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려고 노력한 좌우합작세력이다.
     이 박사는 민족통합주의자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좌우합작에 대해 찬성했다. 좌우 정치세력이 합작을 하게 되면 민족통합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박사는 김규식 박사를 찾아가 좌우합작운동에 앞장서라고 적극 권유하기까지 했다. 이 박사는 좌우합작이란 것이 성사되기도 어렵고 자칫하면 공산당에 이용당하기 쉬운 것이라는 점을 잘 알면서도, 진정한 좌우합작이 성사되면 민족통합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에서 좌우합작을 지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좌우합작세력은 이 박사와 함께 민족통합을 도모하지 않고 이 박사의 정치적 영향력을 무력화하는 데 보다 많은 노력을 전개했다. 김규식과 여운형을 간판으로 내세운 좌우합작세력이 이 박사에 대해 그와 같이 적대적인 활동을 한 것은 당시의 좌합작운동이 미군정에 의해서 이 박사와 김구 선생을 정치적으로 거세하기 위해 기획·연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박사와 김구 선생이 이끄는 남한의 민족주의세력이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격렬하게 전개하면서 신탁통치 실시를 통해 한반도문제를 해결하려는 미국의 정책에 저항하게 되자, 미국은 반탁세력의 중심인 이승만과 김구를 정치적으로 거세해 버리고 자기들의 말을 잘 듣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어 그들과 협조하여 미국의 한반도정책을 관철하려 했으며,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어 이승만-김구를 정치적으로 거세하려는 목적에서 미군정이 기획한 것이 바로 좌우합작운동이었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이러한 미군정의 음모에 따라 미군정의 지원을 받으며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 박사는 그러한 음모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민족통합을 위해서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1946년 10월 좌우합작운동이 좌우진영의 중심에 있는 세력들의 반대로 완전히 실패된 후에도 좌우합작운동 주도세력이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좌우합작위원회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자 이 박사는 좌우합작위원회의 활동을 반대하기 시작했다. 좌우합작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미군정의 지원 아래 ‘중간파 세력’을 형성하여 이 박사의 정부수립 노력을 방해했다. 중간파는 이 박사의 정부수립 노력을 방해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공산당과 제휴했다. 당면 목표가 같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최종 단계에서 중간 우파는 이 박사의 정부수립 노력에 동참했지만, 중간 좌파는 남북협상을 주장하며 끝내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했다.

         <4>
     
     김구세력은 1947년 12월까지는 이 박사의 민족통합노선에 협조했다. 김구 선생과 그 지지세력은 유엔 총회가 결의한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자유총선결의를 지지할 때까지도 이 박사와 협조했다. 김구 선생은 12월 1일에 발표한 성명에서 이 박사의 남한 정부수립노선에 대한 자신의 지지를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천명하기도 했다.

    “우리는…유엔결의안을 지지하는 바이다.…만일 일보를 퇴하여 불행히 소련의 방해로 인하여 북한의 선거만은 실시하지 못할지라도 추후 하시에든지 그 방해가 제거되는 대로 북한이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의연히 총선거의 방식으로 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 그것은 남한의 단독정부와 같이 보일 것이나 좀 더 명백히 규정하자면 그것도 법리상으로나 국제관계상으로 보아 통일정부일 것이오 단독정부는 아닐 것이다. 이 박사가 주장하는 정부는 상술한 제2의 경우에 치중할 뿐이지 결국에 내가 주장하는 정부와 같은 것인데 세인이 그것을 오해하고 단독정부라고 하는 것은 유감이다.” 

     이처럼 이 박사의 정부수립노선을 지지했던 김구 선생은 그해 12월 22일 갑자기 이 박사의 정부수립 노선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때부터 김구 세력은 이 박사의 민족통합노선에 반대하는 세력이 되었다. 상해 임시정부 구성원들의 3분의 1정도에 해당하는 김구 세력은 우익진영 내에서 한민당과 갈등이 심했다. 특히 그해 12월 초에 발생한 한민당의 2인자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가 김구 세력이라는 혐의가 짙어지면서 그 갈등은 심화되었다. 12월 20일 장차 한국을 방문할 유엔위원단을 맞이하여 그들과 정부수립문제를 협의할 우익진영의 민족대표단을 구성함에 있어서 한민당이 김구 세력을 소외시키면서 김구 세력과 한민당 간의 갈등은 폭발했다. 김구 세력은 이 박사가 한민당을 감싸고돈다는 이유로 이 박사와도 결별하기로 한 것이다.
     이 박사는 민족통합을 위해서는 우익진영만이라도 통합이 되어야 하는데 우익진영마저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 따라 김구 세력의 이탈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전개했다. 이 박사는 김구 세력이 불만의 표적으로 삼는 민족대표단을 없었던 일로 하라고 지시했고, 김구 선생과 자주 회동하면서 김구 선생의 분노를 달랬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이 박사 앞에서는 ‘형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말해놓고는 돌아가면 추종자들의 주장에 말려들어 그 말을 뒤집었다. 또한 그 무렵 김구 선생 주변에는 김일성이 파견한 공작원 성시백과 서영해가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김구 선생은 1948년 1월 하순, 북한 정권과 남한 좌익 및 중간 좌파들이 주장해온 남북협상에 동조하는 입장을 발표하여 이 박사의 대한민국 건국 노력에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김구 선생은 유엔 소총회가 남한만의 선거 실시를 결의한 후에도 남한에서만의 선거는 절대반대라고 선언했다. 이 박사는 김구 선생과 김규식 박사를 만나서 “당신들의 남북협상에 반대하지 않을 테니 당신들도 남한 총선 실시에 반대하지 말라. 당신들이 남한 총선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나도 남북협상에 참여할 수 있다.”라고까지 말하며 양김을 설득했다. 그러나 양김은 “형님이 남북협상에 참여한다면 그 사람들이 반대할 것”이라며, 이 박사의 설득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서 양김이 말한 ‘그 사람들’이란 북한공산주의자들이다.
     김구 선생과 김규식 박사는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총선 투표일(1948년 5월 10일)을 코앞에 둔 4월 하순부터 5월 초까지 평양에 체류하면서 북한정권이 기획·연출한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및 남북조선 요인회담에 참석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는 연극의 조연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5>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박사는 민족통합노선에 따라 우리 민족의 모든 정치세력이 단합하여 조속히 자주적으로 우리 민족의 통일국가를 건국하려고 노력했으나, 공산세력, 좌우합작세력(중간파세력), 김구 세력의 반대로 그에 성공하지 못했다. 공산세력의 반대로 인해 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이 박사의 계획이 좌절되었고, 좌우합작세력과 김구세력의 반대로 인해 남한의 정부만이라도 모든 정파의 단합을 토대로 수립하고자 하던 이 박사의 희망이 깨졌다. 반대세력들의 반대투쟁에 부딪쳐서 이 박사의 민족통합노선이 관철되지 못함으로써 남북분단이 초래되고 대한민국 건국에 남한 내 일부 정치세력이 불참한 것을 두고, 이 박사가 민족분열주의자였기 때문에 남북분단이 초래되고 대한민국 건국에 남한 내 일부 정치세력의 불참이 초래되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분간하지 못하고 실존했던 사실을 외면하는 억지주장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