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황제의 밀사 (25)

     대한제국 공사관을 향해 걷는 내 머릿속에는 조금 전에 헤어진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반역자 김윤정을 유인해내는 작전은 사소한 일이었다. 혹시 노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본 암살자 따위도 무시되었다. 말로만 듣던 왕자(王子) 이강의 실체는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조선 땅에서는 이강이 국고를 펑펑 낭비하면서 주색에 탐닉하는 호색한, 포악한 성품에 야차 같은 모습의 괴물로 알려진 왕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 반대의 모습이 아닌가? 이강은 귀인 장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엄귀인 아들 영친왕(英親王) 이은(李恩)의 이복형이다.

    고종의 왕비 민씨는 성품이 독해서 장귀인과 엄귀인은 온갖 박해를 당했다. 특히 의친왕 이강을 낳은 장귀인에 대한 증오는 엄청났다. 의친왕은 민비의 아들 순종보다 겨우 두 살 아래인 것이다. 결국 장귀인은 민비의 손에 처참하게 죽고 의친왕 이강은 고아로 자랐다.

    민비가 을미사변으로 죽고 나서 엄귀인은 새 세상을 만나 왕자 이은과 함께 영화를 누리지만 이강은 여전히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한다. 민비의 아들로 황태자가 된 순종이 후사가 없었으므로 엄비는 이제 제 아들인 이은으로 왕세제를 세우려고 온갖 정성을 들이는 상황이다.

    나이로 치면 이강이 스무 살이나 위였고 이은은 올해로 겨우 아홉 살이다. 다 망해가는 나라의 왕실은 모두 이런 것일까? 나는 비운의 왕자 이강의 실체를 본 흥분이 가시지 않은 채 공사관에 닿았다.

    「아니, 그동안 어디 계셨습니까?」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나를 발견한 김윤정이 다가오며 묻는다.
    옆쪽 창가에 서있던 김일국은 시선만 주고 있다.
    「자, 어서 안으로.」
    나를 회의실로 안내하는 김윤정이 허둥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홍철수의 자리는 비었고 안쪽 대리공사의 방문은 닫힌 채 열리지 않는다.

    「소개장을 받아 온 목사님 댁으로 옮겼습니다.」
    마주보고 앉았을 때 내가 말했더니 김윤정이 원망하는 표정을 짓는다.

    「닷새간이나 연락이 없어서 걱정했었습니다. 여기도 치안상태가 불안하거든요.」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머리를 숙여 보인 내가 김윤정을 보았다.
    「딘스모어 의원께는 연락이 되었습니까?」
    「예, 통화가 되었습니다. 곧 헤이 장관과 면담일을 잡아서 연락을 해준다고 했습니다.」
    「다행입니다.」

    머리를 끄덕인 내가 김윤정을 보았다.
    「제가 오늘 저녁에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요. 건너편에 모니카라는 식당이 있던데 시간을 내주실 수 있습니까?」
    「오늘 저녁에 말씀입니까?」
    머리를 든 김윤정이 묻더니 곧 얼굴을 펴고 웃는다.
    「좋습니다. 초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몇 시가 좋겠습니까?」
    「여덟시로 하지요.」
    「그러지요.」

    선선히 응락한 김윤정이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잇는다.
    「경비도 부족하실 텐데 괜찮겠습니까?」
    「목사님을 따라 교회에 나갔더니 신도들이 성금을 걷어주시더군요.」
    「아, 그렇습니까?」

    실제로 그렇다. 햄린 목사와 함께 교회에 나가 조선의 상황을 신도들에게 이야기 했더니 15불이나 성금이 모여 나에게 건네졌다. 귀한 돈이었다.

    그때 통역 김일국이 들어서더니 김윤정에게 말했다.
    「서기관님, 공사님께서 부르십니다.」
    「그럼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하면서 김윤정이 일어서길래 나도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저녁때 식당에서 뵙기로 하고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김윤정과 헤어진 내가 사무실을 나왔을 때 배웅하듯이 따르던 김일국이 바짝 붙어서면서 묻는다.
    「약속 하셨습니까?」
    김일국도 작전에 참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