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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돌아온다. 떠난 지 8년만이다.
그 여름, 아들은 너무 고통스럽게 떠났다.
떠나기 전 날이던가? 아들은 엄마를 찾았다.
“엄마, 나 왔어.”
아들은 저만치에서 어두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예비군복 차림이었다. 아들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다가갔다.
하지만 아들은 자꾸 뒷걸음질 쳤다.
“왜 그러고 있어? 어서 집으로 와.”
“엄마, 나는 못 가.”
“왜? 왜 못 오는데?”
마지막 인사를 위해 꿈결의 엄마를 찾았던 것일까? 그리고 2002년 9월 20일, 아들은 조용히 떠났다.아이들에게 부모가 늘 좋지는 않는 법이다. 하지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들은 속이 깊은 아이였다. 말썽 한 번 부린 적 없었다.
해군 의무병에 지원했을 때도 걱정하는 엄마에게 “의무병은 배 안 타요”라고 안심시키던 아이였다.
추석 다음날 화장(火葬)을 했다. 유골 상자와 함께 작은 상자가 전해졌다.
“고인의 몸에서 나온 쇠붙이입니다.”
상자 안에는 아들의 전신을 찢고 할퀸 총탄이며 포탄 조각들이 담겨있었다.
병원 사람은 “쇳조각이 이렇게 많이 나온 것은 처음 봅니다. 3㎏이나 나왔어요. 3㎏.”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부모는 그 쇳조각을 움켜쥐고 오열했다.
‘불쌍한 우리 아들, 얼마나 아팠니?’8년 전인 2002년 6월 29일 제2차 연평해전.
아들 박동혁은 참수리 357정 의무병으로 참전했다.
그날 아침, 북한 684함이 참수리 357정에 집중사격을 퍼부었던 10여 분, 박동혁은 피격당한 윤영하 정장과 이희완 부정장 등을 돌보느라 정신 차릴 틈이 없었다.
22포로 다가갔을 때 얼굴의 3분의 1이 없어진 황도현 하사가 보였다. 사망한 상태에서도 황 하사는 방아쇠를 놓지 않고 있었다.
황 하사를 포 밖으로 끌어내는 순간 적탄 하나가 박동혁의 왼쪽 허벅지를 관통했다. 허벅지를 움켜쥐고 일어났다. 그때 다시 적의 포탄 하나가 옆에서 터졌다.
박동혁은 겨우 몸을 지탱하고 62포로 기어가 적함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적함으로 탄환이 날아갔다. 그때 또 다시 적탄이 박동혁의 오른 팔을 때렸다. 너덜너덜한 오른 팔을 간신히 움직이며 사격을 계속했다. 62포 포신이 빨갛게 달궈졌다.
갈수록 혼미해지는 정신을 애써 추스르는 순간 '파파팍' 적탄이 온몸을 꿰뚫었다.
온몸이 누더기처럼 찢겼다.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진 박동혁은 처참했다.
베드를 둘러싼 링거 병이 22개. 병원에서 빼낸 포탄 파편만 100여 개였다.
그렇게 84일을 보내다 그해 9월 20일 박동혁은 떠났다.28일 오전, 박동혁은 이제 ‘고 박동혁 병장’이라는 명찰을 떼고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엄마와 아빠 앞에 섰다.
그의 명찰엔 PKG 717이란 새 군번과 ‘박동혁함’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유도탄고속함 제6번함인 박동혁함은 햇볕정책 아래 무방비로 당했던 8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용을 자랑한다.
기존 참수리급 고속정에 비해 대함전, 대공전, 전자전 및 함포지원사격 능력이 크게 향상됐다. 사거리 140km의 ‘해성' 대함유도탄과 76㎜리 함포, 분당 600발을 발사할 수 있는 40㎜ 함포를 장착했다.
선체는 스텔스 기법을 적용해 적의 레이더 탐지를 최대한 피하도록 설계됐다. 겹겹이 방화격벽이 설치돼 생존력도 높였다. 저수심에서도 신속 기동이 가능하도록 물 분사방식인 2만7000마력의 워터제트 추진기 역시 국내기술로 장착했다
2차 연평해전에서 전사한 윤영하, 한상국, 조천형, 황도현, 서후원함에 이은 여섯 번째 수호신으로 ‘박동혁함’은 이날 부산항에서 진수식을 가졌다.
홍천에서 이날 진수식을 위해 부산을 찾은 아버지 박남준씨와 어머니 이경진씨, 동생 동민씨는 기자에게 “우리 동혁이가 다시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아들이 제게 신고를 하네요. ‘병장 박동혁, NLL 사수를 명 받았습니다’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