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황제의 밀사 (23)

     내가 옮긴 숙소는 김일국과 친분이 있는 미국인 스미스(Smith)씨 집이었다.
    나는 김일국을 믿기로 한 것이다.

    새 숙소는 본채 옆쪽의 창고를 개조했기 때문에 응접실, 침실, 주방까지 갖춰져 있어서 셋집이나 같았다. 더욱이 저택 옆문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출입도 불편하지 않았다.

    새 숙소로 옮긴지 사흘째가 되는 날 아침, 대사관에 가려고 옷을 차려입던 나는 노크 소리에 긴장했다. 스미스씨하고는 저녁밥만 같이 먹기로 계약이 되어있어서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없는 것이다.

    「누구시오?」
    문으로 다가가면서 내가 영어로 물었더니 조선말 대답이 들렸다.
    「미스터 리가 왔습니다.」

    문을 연 나는 낯선 사내를 보았다. 내 또래의 사내였는데 말쑥한 양복 차림에 웃음 띤 얼굴이었다.

    「이승만씨 아닙니까?」
    사내가 물었으므로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난 이강입니다.」
    하면서 사내가 손을 내민 순간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의천왕(義親王) 이강(李堈)이다.

    「저하.」
    놀란 내가 눈만 크게 떴을 때 이강이 손을 더 앞으로 내밀었다. 얼굴에는 웃음기가 더 짙어졌다.

    「이공, 악수는 하셔야지요.」
    나는 이강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몸을 비껴 이강을 집 안으로 들였다. 이강의 뒤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집밖에 수행원을 세워 둔 모양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선 이강이 응접실을 둘러보는 시늉을 하더니 낡은 소파를 눈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공, 앉아도 되겠습니까?」
    「예. 저하, 앉으시지요.」
    「이공도 거기 앉으세요.」
    자리에 앉은 이강이 눈으로 앞쪽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앉았더니 이강이 이제는 차분해진 표정이 되었다.
    「김일국한테서 여기 계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내가 일찍 알았다면 좋은 숙소를 소개시켜 드릴수가 있었을 텐데요.」
    「아닙니다. 왕자 저하.」
    「난 왕자 칭호가 싫으니 우리 서로 미스터 리라고 부릅시다.」
    「저하,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이공께서도 같은 왕족 아닙니까? 운이 좋으셨다면 지금쯤 조선 왕이 되셨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저하, 그렇지 않습니다.」

    당황한 내가 손까지 저었다. 왕실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지만 왕자와 이렇게 대면한 적도 없고 이런 파격적인 말을 들은 적은 더더욱 없다.

    다시 이강이 말을 잇는다.
    「공사관은 이미 적국 수중에 떨어진 것이나 같습니다. 만일 이공이 숙소를 옮기지 않으셨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 되셨을 거요.」

    그리고는 이강이 길게 숨을 뱉는다.
    「지난달에 죽은 재미(在美) 독립협회장 박용수가 공사관에 갔기 때문에 정체가 드러나 살해 된 것이오.」
    「저하께서는 그를 어떻게 아십니까?」

    내가 물었더니 이강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들의 후원자였소. 박용수가 살해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공사관에 희망을 걸고 있었지요.」

    그러더니 이강이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그것은 내 헛된 꿈이었소. 황제가 제 욕심만 차리는 마당에 어떤 인간이 목숨을 걸고 국가에 충성을 하겠소?」

    나는 숨을 삼켰다. 이것이 왕자의 말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