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황제의 밀사 (21) 

     김윤정(金潤晶)은 깔끔한 용모에다 웃음 띤 얼굴이어서 호감이 가는 인상이다.
    인사를 마친 김윤정이 앞쪽에 앉더니 말을 잇는다.
    「홍서기관한테서 이야기를 들으셨겠지만 대한제국 공사관은 이미 일본국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나 같습니다.」

    나는 눈만 껌벅이며 김윤정을 보았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다시 화가 솟구쳤지만 이제는 기력이 떨어져서 입을 열지도 못했다.

    그때 김윤정이 길게 숨을 뱉았다.
    「제가 딘스모어씨한테 연락을 할 테니까 며칠만 기다려 주시지요. 그리고,」
    잠깐 말을 멈춘 김윤정이 방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하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대리공사한테는 이 일을 비밀로 하셔야 됩니다.」
    내 시선을 받은 김윤정이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바로 일본 측에 보고가 될 테니까요. 대리공사는 일본의 개가 되었습니다.」

    나는 숨을 멈췄다가 한참 후에야 공기를 들이켰다.
    미국 땅에 있다고 일본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때 김윤정이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는 표정을 짓고 물었다.
    「참, 의친왕(義親王) 저하가 지금 워싱턴에 계십니다. 한번 만나보시지 않으시렵니까?」
    「왜 만납니까?」

    내가 불쑥 그렇게 물었더니 김윤정이 다시 부드럽게 웃는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의친왕께 밀서 이야기를 하셔도 될 겁니다. 그리고 의친왕께서는 워싱턴 사교계에 꽤 발이 넓으시지요.」
    「우선 서기관께서 애써주시고 그것이 안 된다면 부탁을 드리지요.」

    그러자 내 표정을 본 김윤정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호텔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곧 연락을 드리지요.」

    자리에서 일어선 김윤정이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약소하지만 3불 들었습니다. 저희 공사관도 자금이 넉넉하지 못해서 우선 이 돈으로 호텔 비를 내시지요.」
    「고맙습니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봉투를 받았다. 마침 수중에 몇 십 센트밖에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호텔 숙박비가 하루에 50센트였으니 엿새 숙박비는 된다.

    김윤정과 헤어지고 나서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지만 홍철수는 보이지 않았다.
    공사관 건물을 나와 거리를 오십 미터쯤이나 내려갔을 때였다. 한적한 거리의 뒤쪽에서 급한 구두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조선말로 누가 부른다.

    「저 좀 보십시오.」
    몸을 돌린 나는 양복 차림의 사내를 보았다. 동양인이다. 사내가 가쁜 숨을 고르면서 내 앞에 섰다.
    「저는 김일국이라고 합니다.」

    사내는 20대 초반쯤 되었다. 건장한 체격에 눈이 맑았고 입술은 꾹 닫쳐졌다. 긴장한 듯 얼굴을 굳히고는 말을 잇는다.
    「황제의 밀서를 품고 오셨지요?」
    불쑥 사내가 물었으므로 나는 이맛살부터 찌푸렸다.

    「댁은 뉘시오?」
    「예, 저는 조선 공사관에서 통역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사내가 머리를 숙여보이고는 정색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고아로 자라나 열한살때 선교사의 양아들이 되어 미국 땅에 온지 이제 14년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나이는 스물다섯. 나보다 다섯 살 연하가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