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황제의 밀사 ⑳ 

     햄린(Hamlin) 목사를 만난 후에 나는 아이오와 서클에 위치 한 한국공사관을 방문했다.
    오전 11시쯤 되어서 공사관 건물 1층의 사무실은 방문객으로 붐비고 있었는데 홍철수 서기관이 나를 맞았다.

     옆쪽 조그만 회의실로 나를 안내한 홍철수는 30대 중반쯤으로 단정한 용모의 사내였다.
    민영환으로부터 워싱턴 공사관의 홍철수 서기관을 찾아 도움을 받으라는 말을 들은 터라 내가 물었다.

    「민대감께서 연락을 주셨는지요?」
    「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홍철수가 그늘진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공사께도 비밀로 해야 되는 터라 여간 조심스럽지 않습니다.」
    「그러시겠지요.」
    했지만 내 가슴은 금방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공사는 대한제국 관리가 아니란 말인가? 황제의 밀서를 품고 있으면 공사 이하 전 공사원이 극력 협조를 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때 홍철수가 말을 이었다. 내 표정을 읽은 것 같다.
    「민대감께서도 이 일을 공사께도 발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믿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여럿이 알면 소문으로 새어나갈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러자 심호흡을 한 내가 정색하고 말했다.
    「먼저 아칸소주 하원의원으로 계시는 딘스모어씨를 만나야 될 것 같습니다. 서기관께서 주선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만.」
    「제가 연락을 해 보겠습니다.」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입맛을 다신 홍철수가 나를 보았다.
    「호텔에서 기다리시면 연락을 드리지요.」
    「저는 호텔비도 부족합니다.」

    마침내 내 얼굴은 상기되었고 목소리가 떨렸다.
    그야말로 지구를 반바퀴나 돌아서 이곳에 왔다. 교인의 성금에다 친우의 여비까지 쪼개 받고 무전취식을 하거나 3등칸만 타고서 달려온 이유가 무엇인가? 이곳에서는 미리 연락을 받았다니 준비는 해 놓고 있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홍철수를 쏘아보았다.
    「나를 대리공사님과 만나게 해 주시지요. 민대감께서 비밀로 하라고 하셨지만 나는 황제의 밀서를 품고 온 사람입니다. 사정이 급박하니 말씀을 드리고 협조를 받아야겠습니다.」

    그러자 홍철수가 당황한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가 동료 서기관과 상의를 해보고 곧 말씀 드리지요.」
    「아니, 비밀로 하신다고 했지 않습니까?」
    「김윤정 서기관은 믿을만합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홍철수가 말을 잇는다.
    「공사관 업무가 여간 바쁜 것이 아닙니다. 조선인들의 범죄가 늘어나고 있는데다 거의 매일 일본 대사관에서 나와 둘러보고 가거든요.」
    「......」
    「만일 그들이 이공께서 황제폐하의 밀서를 소지하고 있는 줄 안다면 우리는 당장에 조선으로 소환될 것입니다.」

    그것은 각오하고 있어야 할 일 아니었던가?
    실망한 내가 어금니를 물었을 때 홍철수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제가 잠깐 나가서 김서기관하고 상의를 하고 오겠습니다.」

    홍철수가 방을 나가자 나는 길게 숨을 뱉았다. 이곳도 조선 땅과 마찬가지가 되어있는 것이다. 명색이 일국의 공사관이었지만 이제는 일본국의 속령 사무실 같다.

    방문이 열리는 기척에 머리를 들었더니 사내 하나가 들어서고 있다. 사내가 웃음 띤 얼굴로 다가오며 말한다.
    「제가 김윤정 서기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