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공화국(南越)은 멸망하고 베트남 민주공화국(北越)이 적화통일을 달성했다.

    하지만 그 다음날인 5월 1일에도 사이공 시내에서는 구남월정규군 패잔병 수만명이 숨어있는 것을 색출해서 체포하기 위한 소탕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콩 볶듯이 시내 이곳저곳에서 울려퍼지는 총성을 들으면서 시민 대다수는 증오가 가득하고 살기가 충만한 집 바깥으로는 나가지 않고, 문을 굳게 잠근채 신경을 곤두세우고 방안에서 숨을 죽여가면서 긴장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 베트남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간수가 몰래 찍어준 사진 ⓒ 뉴데일리
    ▲ 베트남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간수가 몰래 찍어준 사진 ⓒ 뉴데일리

    ◆ '가고 오지 않으리' 자결하기로 결심하다

    바로 그 무렵인 1975년 5월 1일 오전 8시반경, 베트남 공산군이 검문하지 않는 국제 외교관 표지판을 단 세단을 타고 일본 대사관 와타나베(渡邊) 참사관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우리 한국인들을 적극 도와주었으나, 베트남 공산 측과도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은 당시 북베트남 측에 6천만 달러의 경제원조를 제공해 준 바 있으며, 양국 간의 국교수립 교섭도 진행 중에 있었다. 와타나베 참사관은 좌익 인사는 아니었으나, 북한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일본 좌익의 거물급 작가 마쓰모토 세이쵸(松本淸張)의 사위이기도 했다.

    그의 베트남 공산측에 대한 정보는 상당한 신빙성이 있었으며, 나와 그는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와타나베 참사관은 북한 고위급 정보요원들이 벌써 사이공에 들어와 있으며, 베트남 공산측과 긴밀히 협조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긴 한숨을 내쉬면서 잠시 생각하더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즉, 믿을 수 있는 소식통에 의하면 북한 공산정권은 베트남 공산정권과 협의하여 곧 이곳 그랄병원에 와서 한국외교관 8명 전원을 평양으로 끌고 갈 것이라고 하니 각오를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꼭 필요시에는 이미 죽을 결심을 확고히 하고 있었지만 그 말은 나에게 충격적이었다. 나는 북한 요원이 나타나서 끌고 가려고 하면 그자들을 쏘아 죽이고 자결하기로 했다. 북한 공산사회가 어떠하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지옥에 끌려가 수모를 당하며 대한민국을 욕되게 하기보다는 깨끗이 생애를 마칠 각오였다.

    나라 위해 무거운 임무를 수행하다가 닥친 극한적인 위기상황 이었다. 그런 가운데 무사(武士)가 생사의 갈림길에 서서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주저없이 죽음의 길을 택하는 순박하며 고귀하고 결연한 행동, 그것이야말로 기마민족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은 뜨거운 피가 흐르는 20세기 태릉육사인(陸士人)이 취할 산화(散花)의 미학임에 분명했다.

    나이 쉰이면 살만큼 살았다. 조국의 자유수호를 위해 적탄에 맞아 피 흘리며 전지(戰地)를 달리면서 고생도 많이했지만, 또한 조국으로부터 많은 혜택도 받았다. 언젠가는 필연코 가야 할 죽음의 길, 이제 그 시기가 온 것이다.

    나는 권총을 꺼냈다. 38구경 5연발 리볼버 권총이다. 실탄 5발이 장전되어 있다. 머릿속이 탁 튀며 앵 하는 소리가 나는 듯 했으나 마음은 가을하늘과 같이 맑고, 가슴이 한 없이 넓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 갈 때가 온것이다. 미련없이 가야한다.

    ‘가고 오지 않으리, 오지 않으리.’

    막둥이와 셋째 아들이 선두에 선 가족들 모습이 눈앞을 스쳐갔으나, 그것은 순간일 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와타나베씨, 고맙습니다. 나는 북한에 불법으로 강제로 끌려가서 대한민국 외교관으로서 명예를 더럽히는 것보다는 확고한 국가관, 사생관에 입각하여 자결할 결심입니다. 북한 공산요원들이 나를 끌고가려고 이곳에 나타나면 자결하겠습니다.” 와타나베 참사관은 진지한 내 얼굴을 바라보며 내 손을 잡고 자결할 마음은 먹지 말아달라면서 울었다. 옆에 서 있던 이규수 참사관도 울고 있었다. “확고한 내 결심은 아무도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어서 돌아가 주십시오, 와타나베씨.”

    한참동안 눈물로 만류하던 와타나베 참사관은 돌아갔다. 나는 한동안 앉아있다가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무법자들에게 비극의 종말을 맡길 것이 아니라 어떤 대책을 강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벌떡 일어났다. 안된다. 지혜롭고 힘찬 도전과 응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손쓸 수 있는 일들을 이것저것 떠올리면서 조치를 취해 나갔다.

    ◆ '생지옥' 치화형무소에 들어가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곧 나타난다던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3호청사) 요원들은 이날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 대신 베트남 공산측이 프랑스 대사관에 강력한 압력을 가했다. 프랑스 대사관은 하는 수 없이 프랑스 치외법권지역에 있는 한국인 전원을 밖으로 내쫓는 조취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인들을 괴롭히는 베트남 ‘안닝노이찡’(安寧內政= 정보공작 수사특별경찰)의 3인방은 수사과장이며 한국인들이 ‘광대뼈’라고 별명지은 ‘린’대위, 그의 동료이자 한국인들이 ‘키다리’라고 별명지은 ‘홍’대위, 한국인들이 ‘튀기’라고 별명지은 한국말이 유창한 ‘즈엉징특’이라는 요원이었다. 이들은 한국외교관 3명과 민간인 11명을 사이공 치화형무소에 투옥시켰으며, 여기에는 나도 포함되었다.

    치화형무소는 8각형으로 연결된 4층 건물이며, 안마당 중앙에는 칼을 거꾸로 꽂아놓은 모양의 감시탑이 우뚝 서 있었다. 이같은 형상은 이 무서운 형무소에 투옥된 수감자들은 살아서 옥문을 나가지 못한다는 위압을 주기 위한 조형물로 알려져 있다.

    유독 이 형무소에는 섬뜩하고 무서운 유령이 야밤중에 심심치않게 나타나서 마음 약한 수감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치화형무소는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이 생지옥에서 우리정부가 나를 빼내오는데 약 5년이 걸렸다.

     

  • ▲ 베트남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간수가 몰래 찍어준 사진 ⓒ 뉴데일리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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