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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평야에서 기원전 1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수장급 인물의 목관묘(木棺墓)가 발굴됐다.
특히 목관과 그 주변에서 수준 높은 유물이 대량으로 발견돼 상당한 세력을 지녔던 인물의 묘로 추정되며 경주평야에서 이런 목관묘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이로써 신라가 태동한 곳은 경주평야 일대가 아니라 사라리 130호분이라든가, 조양동 38호분 같은 대형 목관묘가 발견된 경주 외곽 지역일 가능성이 있다는 고고학계의 주장이 힘을 잃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 문화재조사연단은 경주평야내 탑동 21-3ㆍ4번지 소규모 단독주택 신축 예정지 790㎡를 발굴조사한 결과, 목재가 자연 탄화하는 과정에서 숯처럼 변한 목관의 흔적과 함께 옻칠을 입힌 나무 칼집에 동검(銅劍)이나 철검을 끼운 칠초동검(漆鎖銅劍)과 칠초철검(漆鎖鐵劍) 등 많은 유물을 발굴했다고 18일 말했다.
목관을 묻은 묘광(墓壙.무덤구덩이)은 평면 모죽임 장방형으로, 동-서 방향으로 장축을 마련했으며 크기는 길이 296㎝, 너비 144㎝였다. 목관은 발견된 흔적으로 볼 때 묘광에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안치됐으며 평면 형태는 'ㅍ'자형, 크기는 길이 196㎝, 너비 84㎝로 나타났다.
목관 내부에서 칠초동검과 칠초철검, 칼자루 끝장식인 검파두식(劍把頭飾), 청동 팔찌, 목걸이, 그리고 시신 얼굴을 가리는 데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칠기 부채 등의 유물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나아가 묘광과 목관을 채운 흙인 충전토에서는 기원전 2~1세기 무렵 이 지역을 대표하는 토기들인 조합식 우각형 파수부호(쇠뿔 모양 자루가 달린 항아리)와 양이부호(兩耳附壺. 두 귀가 달린 항아리), 주머니호는 물론 이른바 북방 계통 유물로 평가되는 쇠솥인 철복과 철모, 재갈, 호랑이 모양 허리띠 버클인 호형대구(虎形帶鉤), 그리고 탄화한 흔적으로만 남은 칠기도 다량으로 발굴됐다.
이들 유물 중 개구리 장식이 경북 영천 입실리 유적 이후 두 번째로 확인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 목관묘가 갖추고 있을 요갱(要坑)에 대한 조사까지 이뤄질 경우 더욱 많은 유물이 출토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요갱은 기원 전후 무렵 영남지방 일대에서 유행한 무덤 양식인 목관묘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묘광 중간에 둥근 구덩이를 파고 유물을 매장하는 공간이다.
실제로 이 목관묘에서 출토된 유물, 특히 토기로 보아 이 무덤은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한 기원전 57년과 근접한 기원전 1세기 중ㆍ후반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에 출토된 유물 구성은 창원 다호리 유적과 상당히 유사하다.
시신 안면을 부채로 가린 사례는 창원 다호리 유적 1호 목관묘에서 처음 확인된 이래 경북 성주군 예산리 유적 40호분과 김해시 봉황동 431번지 유적, 그리고 경북 경산시 압량면 유적 94호 목관묘에서 발견된 적이 있어 이번 경주발굴까지 종합할 때, 이런 독특한 매장 풍습이 기원 전후 무렵 지금의 경상도 지역 전역에 걸쳐 유행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했다.
신라 고고학 전공인 윤형원 국립대구박물관 학예실장은 "출토 유물로 볼 때 (무덤 축조 시기는) 서기 2세기 무렵에 조성된 사라리 130호분보다는 분명히 빠르고, 조양동 38호분보다는 약간 늦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조사단은 "지금까지 조양동 유적, 사라리 유적 등 주로 경주지역 외곽에서만 확인돼온 수장급 묘가 경주 시내에서 처음으로 발견됐다는 데 무엇보다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역시 신라 고고학자인 이은석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실장은 "현재 조사 지역과 가까운 월정교 남쪽 농지대에서 1988년 기원전 2~1세기 무렵에 만든 토기편 일부가 확인된 적이 있어 이 일대 어딘가에 사로국(신라) 건국 세력 집단이 묻힌 고분들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은 있었지만 이번에 그런 사실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됨으로써 초기 신라세력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획기적인 돌파구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