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투쟁(鬪爭) (28)

     「저기 있습니다.」

    깊은 밤, 재석이 손으로 가리키는 저택 담장 밑에 어른거리는 물체가 보인다.
    사람이다. 이곳은 삼청동의 시위대 막사 아래쪽 거리다.

    민가를 개조한 주막이 세집에 한집꼴로 세워졌는데 모두 시위대에 잡혀간 가족들을 손님으로 받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깊은 밤에도 오가는 행인이 많았고 밥집의 불이 켜졌다.
    옥리나 시위대 장교를 매수하여 밤에 음식을 들이거나 면회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재석과 함께 다가갔을 때 담장에 붙어서있던 두 사람이 놀란 듯이 몸을 굳히고 있다.
    「아가씨.」
    재석이 먼저 부르자 그림자 하나가 담장에서 떨어져 나왔다.
    오선희다. 옆으로 붙어선 사내는 청지기 문규였다.

    눈을 크게 뜬 오선희가 나를 보았다.
    「선생님, 여긴 왠일이세요?」
    「나도 수소문을 했더니 영감께서 이곳에 갇히셨다는 말을 듣고 온 것이오.」

    다가선 내가 말을 이었다.
    「아가씨도 이 곳에 계시리라 짐작했소.」
    「지금 나으리께서는 제3시위대 감옥에 계십니다.」
    추위로 몸을 웅크린 문규가 말했다.

    「그래서 저희들은 안으로 모리씨를 들여보냈지요.」
    「모리씨라니?」

    내가 묻자 힐끗 오선희의 눈치를 살핀 문규가 말을 잇는다.
    「포목 수입상으로 궁내부에 발이 넓은 일본인입니다.
    그 사람은 돈만 주면 사형수도 석방시킨다는 소문이 났지요.」
    「......」
    「제가 찾아가 사정을 했더니 이곳까지 같이 와 주셨습니다.
    지금 모리씨는 시위대 안에 들어가 계십니다.」

    머리를 끄덕인 내가 오선희를 보았다.
    장옷을 뒤집어 쓴 오선희는 시선을 내리고 있다.
    당당했던 자세는 간 곳이 없다. 소리죽여 숨을 뱉은 내가 물었다.

    「모두 나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저 때문입니다.」

    번쩍 머리를 든 오선희가 머리까지 저으며 말했다.
    「제가 경솔하게 행동 했습니다.」
    그 순간 어둠속에서도 오선희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줄기가 드러났다.

    입맛을 다신 내가 외면했을 때 문규가 다급하게 말했다.
    「저기, 모리씨가 오십니다.」

    머리를 든 나는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두 사내를 보았다.
    앞장 선 사내는 키가 작았지만 어깨가 넓었고 비대한 체구다.
    양복 차림에 다리에는 각반을 매었으며 지팡이를 쥐었다.
    뒤를 따르는 큰 키의 사내는 시종같다.

    「나으리.」
    앞장 선 사내가 다가섰을 때 문규가 허리를 굽신하면서 묻는다.
    「일이 잘되셨습니까?」

    그러자 사내는 대답 대신 나를 쏘아보았다.
    콧수염을 기른 사내의 눈빛이 날카롭다. 나이는 40대쯤으로 보인다.

    「이 사람은 누군가?」
    하고 사내가 유창한 조선어로 물었으므로 내가 대답했다.

    「목사께서 내 외숙이 되시오.」
    나는 허기영의 행세를 한 것이다. 그러자 사내의 시선이 오선희에게로 돌려졌다.

    「궁내부 관리하고 2만원으로 합의를 했소. 2만원에서 단 1원도 깎아줄 수 없다는거요.」

    그리고는 사내가 헛기침을 했다.
    「내일 저녁때까지 준비하지 못하면 바로 심문하고 감옥서로 압송된다는 것이오.
    감옥서에 압송되고 나면 빼내기가 어렵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