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동 감독은 질문을 품었다.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시’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본인에게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나 이창동에게 ‘영화’란 무엇인가.
-
- ▲ 영화 '시' 포스터 ⓒ 뉴데일리
이 감독의 다섯 번째 영화 <시>에서 여주인공 ‘미자’는 한달 동안 한편의 ‘시’를 완성해야 하는 과제를 받는다. 66세가 될 때까지 한번도 시를 써본 적이 없는 그녀에게 ‘시’는 도전이다.
이 감독의 전작인 <초록물고기>의 ‘막둥이’ <박하사탕>의 ‘영호’ <오아시스>의 ‘종두’ <밀양>의 ‘신애’ 이들은 모두 영화 속 사건의 중심이 된다. 모두 어긋난 세상, 무심한 시선의 피해자들이다.
그러나 <시>의 주인공은 다르다. ‘미자’는 영화를 관통하는 사건의 주인공이 아니다. 영화 <시>에서 그녀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니다 어찌 보면 제 3자의 입장에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벌어지는 행태들을 바라본다. 이 영화에서 오히려 가해자 혹은 피해자 그들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바라보는 입장의 ‘미자’의 가슴에는 참을 수 없는 응어리가 맺힌다. 66세가 될 때까지 한번도 속내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던 ‘미자’는 ‘시’를 통해 세상에 대한 외침을 감행한다.
◆ 영화 속의 詩
<그리운 부석사>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 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하나 짓네-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창작과 비평사, 1997
<너에게 묻는다>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외롭고 높고 쓸쓸한」 문학동네, 1994
<시를 쓴다는 것>시를 쓴다는 것은
동지섣달 이른 새벽
관절이 부어 오른 손으로
하얀 쌀 씻어 내리시던
엄마 기억하는 일이다
소한의 얼음 두께 녹이며
군불 지피시던
아버지 손등의 굵은 힘줄 기억해내는 일이다시를 쓴다는 것은
깊은 밤 잠 깨어 홀로임에 울어보는
무너져 가는 마음의 기둥
꼿꼿이 세우려
참하고 단단한 주춧돌 하나 만드는 일이다
허허한 창 모서리
혼신의 힘으로 버틴
밤새워 흔들리는 그 것, 잠재우는 일이다시를 쓴다는 것은
퍼내고 퍼내어도
자꾸만 차 오르는 이끼 낀 물
아낌없이 비워내는 일이다
무성한 나뭇가지를 지나
그 것, 그 쬐끄만한
물푸레 나뭇잎 만지는
여백의 숲 하나 만드는 일이다- 조영혜
<십일월>당신의 등에선
늘 쓰르라미 소리가 나네당신과 입술을 나누는 가을 내내
쓰르라미 날개를 부비며 살고 있네
귀뚤귀뚤 나도 울고 싶어지게
쓰르람쓰르람
눈부비며 살고 있네
이제껏 붉던 입술은
낡은 콘크리트 벽안의
박제 된 낙엽처럼
바시시바시시 떨고 있네
지난 여름 손톱에 핀 봉선화 져 가도록
당신의 등에서 자꾸 쓰르라미가 울고
귀뚤귀뚤 나도 따라 먹먹해져서
당신과 포개어 가만히 누워 보고 싶네- 조영혜
<장미 가시의 이유>날 훔치려 말아요
내 안의 가시
온 몸 소름으로 돋는 날
더딘 맥으로 밀어내는 저 대궁의 우울
자결을 꿈꾸는 검붉은 미소 보아요
내민 손 거두어 주세요
수레바퀴는 구르기만 하던 걸요어여쁘단 말로
꺾으려 하지 말아요
아프단 말 대신 자꾸 키워지는 가시
붉은 입술을 지켜야 하는 필사의 무기
소리 없는 눈물
그건, 무던히도 견디어 준 인내의 꽃
모르나요
겹겹의 붉은 물결이 잠시 흔들리는 것은
단지 내 안의 오월 탓이란 걸
이젠 정말
비가와도 가지려 하지 말아요
수레바퀴는 그냥 구르기만 해요- 조영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