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격랑속으로 (25)

    친러 성향의 수구파 정부는 나를 주목하고 있었으리라.

    손탁은 당연히 정부 측에 기울어 있었으며 특히 황실과 가까웠다.
    그러니 신생 대한제국 입장에서는 애국지사일 것이다.

    정부는 독립협회의 창립자인 서재필을 지난 5월에 미국으로 출국 시켰는데 추방이나 같았다.
    미국 시민권자가 되어있는 서재필이어서 정부와 맺은 중추원 고문직을 해임 시키고 출국을 권유하자 다른 도리가 없었으리라.

    나는 앞장서서 정부에 재고용 요청서를 보냈으며 서재필에게도 탄원서를 전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서재필은 남은 7년 10개월 임기분의 수당 2만여원을 받고 떠나버렸다.
    정부가 이제 독립협회를 눈엣가시로 여기기 시작한다는 증거일 것이다.

    「광주 박서방이 오셨소.」

    문 앞에서 기다리던 봉수 엄마가 말했으므로 나는 주위부터 둘러보았다.


저녁 8시쯤 되었다.
광주 박서방이란 박무익을 말한다. 
서당 친구 정유건이 소개시켜 준 의병장, 지금까지 세 번 만났다.

이미 어둠에 덮인 마당을 지나 사랑방으로 다가선 내가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곧 방문이 열리더니 장한(壯漢)이 나왔다.
박무익이다.
그야말로 육척장신에 굵은 눈썹, 검은 피부, 장수감이다.

「주인없는 방에 있었습니다.」
박무익이 머리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나이는 서른이니 나보다 여섯 살 연상이다.

「원 별말씀을.」
나는 박무익과 함께 다시 방에 들어가 마주보며 앉는다.

박무익은 미곡상(米穀商)을 하다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이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기운이 장사인데다 총포술도 뛰어나 휘하에 3백 의병을 거느렸는데 지금은 해산한 채 기회를 노리고 있다.

박무익의 목표는 일본군과 일전을 벌려 조선 땅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저잣거리에 보부상들이 주욱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쓴웃음을 지은 박무익이 말을 잇는다.
「독립협회를 견제할 목적으로 황실에서 보부상을 모은다는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정색한 내가 박무익을 보았다.
지금 박무익은 정유건이 제공한 군자금으로 한성(漢城)에 머무르고 있다.
수하(手下)에 몇 명을 데리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때 박무익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서방님, 제가 일본군 사이에 심어놓은 간자(間子)로부터 들은 말입니다만.」

잠깐 말을 멈춘 박무익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호롱불의 불꽃이 흔들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본 자객이 독립협회 요인(要人)들을 암살할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혐의를 보부상들한테 뒤집어씌운다는군요.
통역으로부터 들은 말인데 믿을만합니다.」

을미사변 때도 그럴 작정으로 훈련원 군사를 궁궐 안으로 데려 온 그들이다.
이미 은퇴한 대원군을 강제로 궁궐로 끌고 간 것도 그 때문이다.

박무익이 말을 잇는다.
「서방님도 조심하셔야 되요. 제가 그 말씀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허, 내가 그런 큰 인물이나 됩니까?」

헛웃음을 웃으며 말했지만 등이 서늘해진 느낌이 든다.
그러나 두렵지는 않았다.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박무익이 길게 숨을 뱉는다.

「그렇다면 독립협회는 보부상들과 일본 자객들로부터 양쪽에서 협공을 받는 꼴이 될 것 같습니다. 형편이 좋지 않습니다.」
나는 물끄러미 박무익을 본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박무익은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도 접전해 본 경험이 있다.
대한제국의 소중한 자산이다. 

저들을 누가 이끌어 줄 것인가?
임금? 나는 저절로 쓴웃음을 지었다.
어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