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격랑속으로 (22)

    제중원 소속 의료선교사 크로포드는 부임한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조선말을 조금은 안다.
    나한테서 조선말을 배운 화이팅이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리, 이리오세요.」
    하고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돌아보기도 전에 쓴웃음을 지었다.

    크로포드다.
    「이리오너라」 하고 사람을 부르는 말을 존대말로 고쳐 불렀다.
    이른바 영어식 조선어다.

    몸을 돌린 나는 정장 차림의 크로포드를 보았다.
    잘룩한 허리가 강조된 원피스 차림에 머리에는 꽃이 장식된 모자를 썼다.
    원피스 밑으로 흰 양말을 신은 다리가 드러났다.

    내 시선을 의식한 크로포드가 수줍게 웃는다.

    나는 무엇을 훔치다 들킨 느낌이 들었다.

    「어디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내가 영어로 물었더니 크로포드가 머리를 끄덕였다.

    제중원 본관 복도 안이어서 오가는 사람 때문에 우리는 벽쪽으로 붙어섰다.

    「정동교회에 다녀옵니다.」
    크로포드는 거기까지 조선말로 하더니 곧 영어로 말을 잇는다.

    「리, 저한테도 조선말 가르쳐주시지요. 하루에 한시간만 시간 내주실 수 있나요?」

    화이팅의 조선어 학습은 끝났기 때문에 시간을 낼 수는 있다.
    그리고 나는 자주 제중원을 들르는 터라 일부러 걸음을 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똑바로 크로포드를 보았다.
    「좋습니다. 언제 시간을 낼 수 있습니까?」

    「일요일만 빼고 매일 오후 3시에서 4시까지.」
    내가 머리를 끄덕였을 때 크로포드가 말을 잇는다.

    「교습비는 월 20불, 괜찮아요?」
    「좋습니다. 교육 방식은 화이팅양과 같은 방법으로.」

    그것은 나는 영어로 말하고 상대는 조선말로 말하는 방법이다.
    화이팅에게 사용해서 효과를 보았다.

    크로포드가 한걸음 다가섰으므로 옅은 향내가 맡아졌다.
    푸른 눈동자, 흰 피부는 윤기가 흘렀고 콧등에 박힌 서너개의 주근깨가 귀엽다.
    물기를 머금은 붉은 입술이 반쯤 벌려져 있다.
    키도 커서 나하고 눈높이가 같았는데 나이는 스물셋, 동갑으로 성격도 밝다.

    크로포드가 물었다.
    「리, 오늘부터 시작할 수 있어요?」
    「좋습니다.」

    「그럼 여의사 휴게실 아시죠? 거기에 가 계세요. 제가 바로 갈테니까.」
    화이팅하고도 그곳에서 공부를 했으므로 나는 몸을 돌렸다.

    광무(光武) 2년(1898) 6월이다.

    나는 내가 만들어 열정을 쏟았던 매일신문(每日新聞)을 그만두고,
    이번 달 10일에 제국신문(帝國新聞)을 창간하여 주필이 되어 있었지만 시간을 낼 수는 있다.

    휴게실에서 10분쯤 기다렸을 때 크로포드가 들어섰다.
    가운으로 갈아입었지만 앞쪽 의자에 앉는 순간에 다시 향내가 맡아졌다.
    화이팅한테서는 약품냄새만 났다.

    크로포드가 내 시선을 받더니 고른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리, 앞으론 저를 수잔이라고 불러주세요.」
    크로포드의 이름은 수잔이다.

    머리를 끄덕인 나에게 수잔이 말을 잇는다.    
    「물론 이렇게 둘이 있을 때만 말이죠.」
    「그러죠. 수잔.」

    심장이 뛰고 몸이 뜨거워진 느낌이 들었으므로 나는 시선을 내렸다.

    수잔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호감을 느끼기는 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가까워지리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수잔 또한 나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기회를 만들 줄은 몰랐다.

    나는 다시 머리를 들고 수잔을 보았다.
    수잔의 얼굴도 조금 상기되어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