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정스님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시신을 화장하는 불교의 다비식이 송광사 야산에서 거행되는 절차를 불교방송의 생방송을 통하여 지켜보면서, 한두 가지 뼈저리게 느낀 바가 있습니다.

    나는 법정과 가까이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봉은사에 암자 하나를 가지고, 아마도 불경 국역에 전념하고 있던 때였을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을 모시고 장준하, 계훈제, 이태영, 천관우 등이 다 함께 <씨알의 소리>의 편집위원으로 자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봉은사에서 절 음식으로 우리 모두에게 저녁을 대접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는 생김새도 단정하고 생각이나 행동이 반듯하여 정말 스님다운 스님이라고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신체제하에서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함께 시작할 때 용감하게 먼저 서명하여 군사정권에 의해 곤욕을 치루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 그는 아마도 사회활동이나 또는 무슨 모양으로의 정치참여가 자신의 수양에 도움이 안 된다고 깨닫고, 깊은 산중에 암자를 마련하고, 세속적인 모든 인연을 끊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내가 듣기에, 자기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생각이 생기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문경새재 근처에 나도 집을 짓고, 은퇴한 누님을 모시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억울한 처지여서, 바람소리 들으며, 저녁노을 바라보며 조용히 살던 어느 날 집 근처에서 우연히 법정을 만났습니다. 그 때 그렇게 반가워하던 그의 얼굴이 지금도 내 눈에 선합니다. 한 때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는 영국시인 워즈워스가 노래한 “생활은 검소하게, 생각은 고상하게”를 실천·궁행한 정말 보기 드문 수도자였습니다. 그는 천성이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즐기지 않았습니다. 그의 땅 위에서의 목숨이 다한 것을 알아차리고, 세속의 말대로 하자면, “장례식은 검소하게, 간단하게 치루어 달라”고 측근에게 당부까지 하였다는데, 그날 다비식은 파격적이어서, 극락에서 부처님과 동행하며 법정의 마음은 심히 괴로웠으리라 짐작합니다.

    다비식에 참여한 문상객이 1만 명은 더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중에는 몇 몇 정치꾼들의 얼굴도 보였습니다. 왜 거기까지 갔는지 뻔한 일이지요. 법정이 불일암에서 아마 3년은 때고도 남았을 그 많은 장작을 보고 법정은 하늘나라에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을 것입니다.

    그의 뼛가루를 몇 개 상자에 나누어 넣어, 이 절 저 절에 보낸다는 것도 입적한 스님의 아름답고 깨끗하던 사람됨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좋아할 처사는 아니었다고 믿습니다. 법정의 죽음을 대하는 속인들의 처사는 반성의 여지가 많다고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