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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사금(납부금)은 아홉 달 째 밀려있었다.
눈매 매서운 일본인 담임선생은 종례가 끝나면 교무실로 소년을 불렀다.
그리곤 회초리로 머리를 톡톡 때리며 “왜 월사금을 내지 않느냐”고 채근했다.
돈이 없었다. 가난한 소작농의 3남3녀 중 다섯째이자 둘째 아들이었던 소년은 끼니도 어려운 삶의 무게를 억지로 지탱하고 있었다. 마침 아버지가 세상을 떴다. 혹독한 세상, 도저히 더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결국 보통학교(초등학교) 3년여를 끝으로 다시는 학교의 문을 찾지 못했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는 돌아서서 눈물 지으셨지만 당신 역시 가난의 굴레에 맞서기엔 연약한 여자일 뿐이었다. -
- ▲ 우곡장학재단 김동철 이사장 ⓒ 뉴데일리
어린 나이에 가난과 맞서 싸워야 했던 그 소년은 이제 86세의 고령이 됐다.
고향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예림리를 떠나 시장에 뛰어 들었던 그 소년은 포목점을 열고 신용을 바탕으로 계속 성장했다. 포목점은 중소기업이 되고, 중소기업은 다시 대기업은 아니더라도 알차고 부채 없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섬유 수출로 국가경제성장에 기여하면서도 그는 항상 ‘어려워서 공부 못했던 아픔’을 잊지않고 있었다. 그래서 장학재단을 만들어 어릴 적 자신과 같은 처지의 학생들을 돕기 시작했다.
1980년 설립돼 올해로 31년째 운영되고 있는 우곡장학재단 김동철 이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25일 서울 중구 정동 우곡장학재단 사무실에는 37명의 풋풋한 대학생들이 모여들었다. 35회째 우곡장학금 수여식. 김 이사장은 이날 이들에게 200만원씩 모두 6800만원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김 이사장은 이들에게 “성실하고 열심히 노력하여 자기 자신에게 자신감을 얻고, 사회와 국가에 필요한 존재가 되라”고 진심어린 당부를 잊지 않았다.
80년 장학재단 설립 이후 어려운 학생들에게 전한 장학금은 모두 20억원이 넘는다.
우곡 장학생들은 그 소중한 장학금에 힘입어 사회의 든든한 재목들로 성장해 나갔다.어렵게 만든 회사가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했지만 가장 서둘러 만들었던 것이 장학재단이었다고 김 이사장은 회고했다.
그는 “마음 한 구석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아 있던 것이 학업에 대한 절실한 소망이었다”라며 “내가 못 이룬 꿈을 후진들에게 돌려주어 그들에게 기틀을 마련해 주면 더욱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고 재단 설립 때를 추억했다.
“평생 작은 소망이 있었다면 첫째는 내 능력에 맞는 기업체를 운영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신용을 바탕으로 적정한 이윤과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며, 셋째는 이윤의 상당 부분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같은 소망들을 모두 이루게 된 점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온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장학생 선발은 철저하게 각 대학들에 맡기고, 미국의 한인 교육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우곡 장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해 사회인으로서 국가와 사회 공동체에 필요한 존재가 될 때 내가 살아가는 보람과 희망이 있습니다.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 자랑스러운 후학들이 많이 배출되는 사회가 건전한 국가를 이룰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김 이사장은 “보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아낌없이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오래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