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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환 장군. ⓒ 뉴데일리
11시 방향 아래로 해인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목표지점 접근 중”
김영환 대령(공군 제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전대장)은 그를 따르던 3대의 무스탕(F-51) 전투기들에게 타격지점을 확인했다.
해인사가 인근 빨치산과 북한군 패잔병에게 점령된 상태였다. 현지에서 전투를 치르던 경찰부대의 긴급 지원 요청을 받은 미 제5공군은 김 대령에게 해인사를 타격할 것을 명령했다.
타격 지점인 해인사 상공에 이르자 김 대령은 순간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이 떠올랐다.
“전대 잠시 대기, 선회비행하라.”
잠시 공격을 중단한 김 대령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해인사엔 국보 제52호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르는 국보 제32호 고려대장경판이 있었다. ‘영국 사람들은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했다. 팔만대장경은 한국 사람들에게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 아닌가?’
김 대령은 다시 무전기를 잡았다. “전대, 해인사 뒤의 적 보급기지만 공격하고 기지로 돌아간다.” 갑작스런 귀환 지시를 모니터링 하던 비행단에서 추궁이 날아왔다. “왜 해인사를 타격하지 않는가?” “빨치산 몇 명 죽이기 위해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을 불태울 수는 없습니다. 돌아가겠습니다.” “귀관의 지금 행동은 항명이다.” “제가 전적으로 책임지겠습니다.”
전시(戰時)였다. 항명은 이적행위로 간주돼 현장에서 처형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당당히 전대를 이끌고 기지로 돌아갔다. 팔만대장경은 이렇게 김영환 대령의 의로운 기상으로 지켜졌다. 만약 그의 목숨과 맞바꾼 용기가 없었다면 우리 교과서엔 “팔만대장경이 6,25때 소실됐다”고 기록됐을 것이다.
고 김영환 장군은 공군 조종사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를 보급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1951년 어느 날 그가 친형 김정렬 장군(전 국무총리) 집에 들렀을 때 형수가 만들어준 머플러를 받아 맨 것이 공군 ‘빨간 마후라’의 시작이다.
공군창설 7인 간부의 일원이었던 김 장군은 6·25가 발발하자 T-6 훈련기를 조종하여 저공비행으로 적 전차와 차량에 폭탄과 수류탄을 던지는 결사적인 공격을 감행, 큰 공을 세웠다. 또 한국 공군 최초로 10명의 동료와 함께 무스탕 전투기를 미 공군으로부터 인수해 전투기 조종사로서 수많은 전공을 거뒀다.
휴전 이후에도 전투조종사 양성 등 공군 전력 향상을 위해 헌신했던 김 장군은 1954년 3월 5일 F-51 전투기를 조종해 사천에서 강릉기지를 향하던 중 악천후로 추락해 순직했다. 34세 때였다.
팔만대장경이라는, 한국 아닌 세계적 문화유산을 지킨 김 장군에게 문화훈장을 추서해달라는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김 장군의 조카이자 김정렬 전 총리의 딸인 김태자씨와 재미교포 ‘김영환 장군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국민들’이 나서고 있다. 이들은 공군 창설 60주년을 맞은 올해, 김 장군의 업적을 올바로 평가해 달라고 정부와 국민에게 호소하고 있다.
이들의 뜻에 동참을 원하는 경우 docuon@yahoo.co.kr로 문의하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