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여름 캄보디아에 출장을 가 있는 동안 쿠데타가 일어났다. 어느 날 새벽 창문을 뒤흔드는 포성에 잠에서 깼다. 공항은 폐쇄됐고 국제전화는 불통이었다. 시내 곳곳에서 시가전이 벌어졌고 피란민이 줄을 지어 도시를 빠져나갔다. 호텔 직원들은 투숙객들을 도와주기는커녕 자신들이 먼저 유니폼을 벗고 피란민 대열에 합류했다.

    그럴 때 의지할 데라곤 우리 정부뿐이다.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시가전이 한창인데 제아무리 외교관이라 해도 목숨이 둘은 아니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캄보디아는 '킬링필드'의 나라다. 1970년대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가 집권한 4년 동안 200만명이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죽어갔다. 해골이 마구 굴러다니던 기념관은 캄보디아에서 대학살이란 불과 20여년 전의 일임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당장에라도 크메르 루주 잔당들이 죽창을 들고 호텔 안으로 뛰어들 것 같았다. 어디로든 피해야 할 것 같아 짐을 꾸렸다. 그런데 어디로 피란을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길도 모르고 말도 몰랐다. 어디가 안전한지는 더더욱 몰랐다. 결국 배낭을 메고 갈 곳은 호텔 로비밖에 없었다.

    비슷한 처지의 외국인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다 보니, 위기에서 빠져나갈 가능성에도 어느 나라 국민이냐에 따라 등급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싱가포르에 주재하면서 정기적으로 캄보디아에 온다는 일본 기자는 "일본대사관에 전화를 걸면 직원들이 화를 내며 자기네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자꾸 전화 걸지 말라고 한다"고 했다.

    캄보디아에 지국을 내러 왔던 미국 통신사 직원은 수시로 대사관에 전화를 건다고 했다. 전화를 걸면 녹음이 흘러나오는데, "시가전이 벌어지면 창문을 꼭 닫고 절대 외출하지 마라. 상황이 긴급해지면 ○○○강 근처에 있는 XX호텔이 집결장소다. 수시로 전화를 걸어 녹음을 확인하라"는 내용이라고 했다.

    영국인에겐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미 엘리베이터 앞에 "영국과 영연방 국가의 국민은 즉시 이 호텔의 ○○○호실로 와서 등록해라. 항공편이 마련되는 대로 대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내용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힘으로 위기에 대처해야 하는 '대책 없는 국민'에 속했던 일본 기자와 나는 그 안내문을 보고 그 나라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물론 10년 전의 일이니까 '옛날 얘기'다. 요즘은 우리 정부의 대응방식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개성공단에 억류된 현대아산 직원 유모씨의 경우를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유씨가 억류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도 정부는 아직 억류된 이유조차 모른다. 지난달 초 북한이 장거리 로켓을 발사한 직후 정부는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에 가입한다는 원칙은 세웠지만 개성공단에 억류된 유씨를 고려해 가입시기를 미룬다고 했었다. 북한이 먼저 언급하기도 전에 우리 정부가 '알아서' 연계시킨 꼴이 됐다.

    그러는 사이 북한이 개성공단 폐쇄카드를 들고 나와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이번엔 개성 문제와 유씨 문제는 별개라느니 유씨 문제가 우선이라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역시 북한에 억류된 미국 여기자들 재판일정이 다가오자, 북한은 미국과 국가 대 국가로 상대하지만 개성공단은 남북 간 합의에 따라야 하는 '다른' 상황이란 주장도 나오고 있다.

    중요한 건 유씨가 안전하게 돌아오는 것이지 어디에 연계되고 다른 경우와 어떻게 다른가가 아니다. 유씨는 지금 딱 정부밖에 믿을 데가 없는 상황이다. 정부는 유씨 문제를 다른 문제와 연계시키거나 비교하지 말고 단독으로 그리고 정면으로 다뤄야 한다.